광릉 봉선사와 운경 큰스님의 추억
40년도 넘은 이야기다. 의정부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신심이 한없이 깊었던 선생님을 따라 여러 친구들이 송산로터리에 있던 의정부포교원에 가서 운경큰스님을 뵈온지가.
우린 그 때부터 정기적으로 운경큰스님께서 법문을 해 주시는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삼보불교학생회란 이름으로 우리들의 모임터를 만들었다. 이후 고등학교를 거쳐 학생회란 이름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우린 청년회란 이름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머리가 커지다 보니 그 안에서 결혼을 한 법우들도 나왔는데, 언제나 우릴 웃으며 반겨주시던 큰스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속에 나는 결혼식 주례를 부탁드리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서울예식장에서 열렸던 결혼식 모습이다. 당시 큰스님께서 내 집사람 이름을 부르실 때 외자인 이름이 어색하셨는지 한 글자를 하나 더 붙여 '이정양'양이라 하시는 바람에 조금 놀래기는 했었다.
1990년대에 들어 25교구 본사 운영을 맡으시게 된 큰스님께서는 마침내 의정부를 떠나 봉선사로 거처를 옮기겼다. 이후 문중의 어른격인 '조실' 소임을 맡으셨다가, 속세로 아흔을 훨씬 넘기시어 열반에 드시니, 나 같은 유발(有髮-머리를 깎지 않았다는 뜻) 상좌들은 그 슬픔을 어찌할 수 없었다. 80여 성상을 불문에 계시면서 평생을 중생교화를 위해 애쓰시다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래도 불가의 가르침이란, 모든 만남은 곧 헤어짐이니 생과 사를 넘는 도리를 잘 헤아려 해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웠으니 언제까지나 슬픈 이별의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었다. 큰스님의 열반후 1년이 지나 여러 제자스님들이 추모비와 사리탑을 세우니 나도 그 때 작은 정성을 더해 큰스님과의 인연을 한쪽에 남기게 되었다.
2013년 7월 27일, 연꽃을 주제로 한 음악회가 봉선사에서 열렸는데, 난 다른 약속이 있어 참석하지는 못하고 그 전날 오후 봉선사에 갔었다. 일주문에는 한글로 된 '운악산 봉선사' 현판이 있고, 절 안에서 보면, 한자로 '敎宗本刹奉先寺(교종본찰봉선사)'라 적힌 현판이 달려 있다.
음악회 포스터. 허각, 박애리와 팝핀현준 등의 출연자 이름이 있다.
봉선사 연꽃밭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꽃이 별로 없었다. 금년 유달리 길게 내리던 비에 꽃들도 시름을 했나보다. 나와 블로그 친구를 맺고 있는 '나나'님의 블로그에서는 부여 궁남지 연꽃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는데 말이다.
일주문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에 부도탑군이 있고 바로 위에 봉선사 부설 연꽃유치원이 있다. 유치원 맞은편은 예전 승과고시를 보던 승과평터가 있던 자리 안내석이 있는데, 이 부근이 지금의 연꽃밭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에 큰 느티나무가 있고, 왼쪽은 기념품 판매소, 그 뒤로 염불원이 자리하고 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무릇 모든 사람은 이 지점에서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다.
시선을 돌리면 대중을 위한 설법이나 각종 의례를 치루는 '청풍루'가 보인다. 1층은 사무실로 사용중. 저 건물을 보면, 월운 큰스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경의 한글화 작업을 진두지휘 하셨던 운허스님의 뛰어난 제자(법손)로 동국역경원을 이끌고 오신 그 큰 뜻을 어찌 다 기리랴.
청풍루앞 당간지주 초석.
예전에는 저기서 직접 물을 떠 먹기도 했었는데...
큰법당과 방적당 모습이 보인다. 저 '큰법당' 현판은 건립당시 온 나라의 화제가 되었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절집에서는 主佛(주불)을 모신 전각에 한자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저 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봉선사가 불교경전의 한글화를 이끌던 운허스님의 본찰이었기 때문이다. 대웅전 기둥에 달린 주련(부처님 말씀을 적음)도 한글로 되어 있다. 대웅전 오른쪽 앞에는 새로 세운 당간이 보인다. 계단에는 그동안 잦은 비로 눅눅해진 좌복(절집에서는 방석을 이렇게 부른다)이 햇살을 쬐고 있다.
큰법당 내부 모습이다. 많은 절에서 대웅전 내부 촬영을 금지하고 있지만, 봉선사는 그런 제지가 없다.
큰법당에서 바라본 청풍루.
능엄대도량(운허 큰스님께서 평생 능엄경을 소의경전처럼 여기시고 설법을 하시었다) 현판이 붙은 건물의 다경실. 조실스님의 거처로 사용된다. 여기 오니 운경 큰스님의 추억이 새롭다. 큰스님께서는 여기를 생전 마지막 거쳐로 삼으셨고, 열반에 드셨다.
봉선사 새종
보물로 지정된 봉선사 동종은 범종루에 있다.
염불원 앞 연못에서 노는 오리들.
일주문으로 내려오면, 공덕비와 부도탑이 보인다.
운허큰스님과 4촌지간이었다고 하는 춘원 이광수 기념비(해방후 6.25 전쟁으로 납북되기까지 여기 봉선사에 머물렀다 한다). 여전히 그의 친일행적에 대해 논란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국 근세 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낮출 수 없을 것이다.
1972년에 세워진 봉선사 중창비에는 운경큰스님(운경기홍)께서 봉선사 총무소임을 맡으셨을 때 삼성각을 중수한 내용이 적혀있다. 월운큰스님(월운해룡)의 당시 소임은 교무. 동국역경원장 운허용하스님이 지으셨다고 되어 있다.
운경큰스님의 부도탑과 추모비. 열반 1주년을 맞아 준공식을 했는데, 그날 눈이 엄청 많이 내려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큰법당 앞들을 쓸고 청풍루까지 내려가서 뒤돌아보면 또 그만큼 많은 눈이 땅을 덮고 있었다. 이 날은 오후부터 서울 지하철이 무료로 개방되었고, 당시 대전에 근무하던 나는 9시 반 무궁화호 특실을 예약했다가, 9시 40분에 떠나는 6시 20분 기차를 타고(일반 기차도 눈 때문에 연발착이 심했다) 서서 천안까지 내려가야 했다. 부도탑에는 큰스님 다비식후 수습된 사리를 모셨다.
운경 큰스님 추모비의 글은 월운 큰스님께서 지으셨다.
맨 왼쪽 재가제자란에 내 이름도 새겨져 있다. 측면에는 내가 활동했던 삼보불교청년회 이름도 있고.
내일 있을 蓮.人음악제 준비가 한창이다.
저녁은 수락산 마당바위에서 당고개로 넘어오는 길에 있는 오리꼬치구이집에서 먹었는데, 둘이서 오리기본을 시켰더니 남았다.
집에 돌아와, 큰스님의 사리 사진첩을 열어본다.
그리고 아주 옛적 사진 한장(지금 남양주시 묘적사에 청년회원들과 함께 여름 수련대회 갔을 때, 시봉보살님들과 함께 오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스님, 그 가르침 평생 잊지않고 실천하겠습니다. 지금도 많이 그립습니다.
이 날, 봉선사 앞 주차장에서 월운 큰스님을 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