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한담]운경스님/봉선사 주지
“자신의 복밭에 씨뿌려 정성껏 가꿀때 복받습니다”
어떤 절대자가 운명 결정하는 것도 극락으로 보내주는 것도 아닙니다
인과법따라 자기가 지은만큼 받게 되니 참회하고 선업 쌓으십시오
“수행통해 몸과 마음 순화되면 이웃까지 저절로 편안해져 나라와 세계가 화평해집니다”
정진중 망상 없애려 하면 더 힘들어지니 내버려두고 화두에 몰두하면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공부와 기도는 절대로 미루면 안됩니다” 분노·증오 멸하고 매사 자비심으로 대하길
양력 ·1905년 충남 서산 生 ·1921년 봉선사서 태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해인사 김용사 유점사 강원서 수학 ·대승사 수덕사 표훈사 유점사 등 선원서 정진 ·자재암·흥룡사 주지 역임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2005.02.27입적
내가 1905년生이니까 새해가 되면서 아흔 세살이 됐습니다.
출가한 지가 엊그제같은데 벌써 8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으니
지난 날이 <금강경>에서 말한 ‘현상계의 모든 것은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같고 이슬같고 또한 번개같으니…’
의 구절 그대롭니다.
새벽 3시면 일어나 좌선과 간경(看經)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3년전에 새벽예불을 나가다 미끄러져 뼈를 다치는 바람에 운신이 힘들어
새벽예불을 직접 모시지는 못합니다만 하루에 7~8시간은 꼭 공부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한세기 가까이 살면서 느끼는 것이 기도나 공부는 절대 미루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이 대신 해줄 수도 없다는 겁니다.
불자들중엔 ‘스님이 다 해주시겠지’ 또는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한가할 때 하면 되지 뭐’
하고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기력이 쇠하니까 마음만 앞서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니
젊을 때 공부를 밀어붙여야 하는 겁니다.
옛날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보조 지눌스님이라고, 고려때 국사를 지낸 유명한 고승입니다.
그 스님에게 누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보조스님이 누님에게 항상 염불을 하라고 할때마다 누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부처님같이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염불공부를 해서 무엇하겠나.
설사 내가 도를 닦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까지 제도해 주는 아우가 있는데
누나인 나야 당연히 좋은 곳으로 제도해 주지 않을라구”
보조스님은 말로써는 누님을 제도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방편을 쓰기로 했습니다.
어느날 누님이 절에 찾아오는 것을 미리 알고 방에 일부러 진수성찬을 가득 차려 놓았습니다.
누님이 들어오자 스님은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혼자서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마침 배가 고팠던 누님은 먹으라는 말도 없이 혼자서 먹는 것을 보고
섭섭하고 노여운 감정이 일었습니다.
“자네 왜 이러나”
“무슨 말씀입니까, 누님?”
“무슨 말이라니? 나는 그만 돌아가야겠네. 몇십리 걸어온 사람을 그냥 앉혀두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한번 먹어보란 말도 없잖은가?
어찌 누이 대접을 이렇게 하는가. 섭섭하네."
“누님, 제가 이렇게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누님이 왜 배가 아니 부르십니까?”
“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다는 말인가?”
“제가 도를 깨치면 누님도 제도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이 배부르면 누님도 당연히 배가 부를텐데요.”
“동생이 밥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를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제가 음식을 먹어도 누님이 배부르지 않듯이
제가 수행하면 제가 제도되는 것이지 누님과는 상관없습니다.
누님이 극락가길 원한다면 누님이 직접 염불을 해야 합니다.
누구도 죽음을 대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극락도 대리극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깨우친 보조스님의 누님은 이후 지성으로 수행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내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가야 하는 주체자는
나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절대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어주는 것이 아니고
극락으로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인과의 법칙대로
스스로 지은만큼 받게되는 것이니 발심참회해 전생에서 쌓인 업장은 녹이고
열심히 선업을 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출가한 것은 16세때입니다.
15살때 사촌형님을 따라 장구경을 갔다가 길을 잃고
집을 찾아오는 길에 탁발하는 스님을 봤습니다.
스님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무척 신기했습니다.
스님이 절에 가면 먹을 것도 주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에
따라다니다 봉선사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때 봉선사 규모는 대단했어요.
조선최고의 승려로 추앙받던 홍월초스님등 노스님이 7~8명,
중견스님들만도 한 40명 사는 큰 절이었지요.
행자생활을 하다가 태오(泰悟)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습니다.
17세때부터 초심 발심 자경문을 배웠고 한 집안이었던 화계사에서 2년동안 목탁치고 염불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때 스님들은 밥먹는 것도 걸음 걷는 것도 다 법도에 맞았어요.
지금의 승려생활이야 옛날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느슨해졌다고 봐요.
당시는 지계가 무척 엄격했지요.
큰스님들은 아랫 사람들이 잘못하면 고칠 때까지 반복하여 일러 주셨지요.
19세가 되던 때 동화노스님 칠순을 맞아 당시 쟁쟁한 명성을 얻고있던
합천 해인사의 고담스님을 초청해 화엄경백일산림을 열었어요.
심부름을 하면서 법문은 한번도 빠지지 않고 들었지요.
초발심은 이미 배웠지만 화엄경이라는 것이 참 대단한 경이구나
하는 것을 처음 느꼈지요
.
그때 스님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셔요.
나에게도 불자들이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질문들을 많이 해요.
기도에는 무슨 특별한 형식이나 고차원적인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한 마음 간절한 마음 하나면 족합니다.
기도는 우선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심과 위신력이 온 누리에 넘치고 있는 것을
깊이 믿고 감사하며 일심으로 마음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사를 자비한 마음으로 대하며 자비행을 펼치고 결코 분노나 증오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불 보살님과 같은 원(願)을 세워 불보살님의 위신력이 함께 흐를수 있도록
아견과 교만과 삼독심을 멸하여 마음을 청정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깨끗이 비우기 위해서는 참회가 우선돼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할 때 모든 아집과 번뇌의 때와 장애의 벽들이 허물어집니다.
이러한 깨끗한 마음바탕위에 일념삼매로 기도를 올릴 때
환희심도 생기고 신심이 확고해지고 따라서 그 기도가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나는 고담스님 말씀을 듣는 즉시 강화 보문사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일생동안 중노릇 잘하고 퇴속치 않게 해주고
부처님 진리를 잘 성취하게 해 달라는 것이 기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삼칠일동안 정성을 다해 했어요.
그 기도인연인지 큰 과오없이 지금껏 부처님도량에서 수도해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해인사가 큰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해인사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수원 용주사까지 걸어가서 하룻밤 자고 김천 직지사까지 갔어요.
거기서 청암사로 해서 해인사로 갔지요.
해인사 퇴설당 참선방에서 두해를 지냈지요.
강원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서 문경 김용사 강원에서 경공부를 했지요.
치문으로부터 사집 사교 대교 공부를 했어요.
경을 다 배운 사람은 참선공부를 했는데 누구는 참선부터 공부하라고 하지만 난 교종본찰로 알려진 봉선사와 인연을 맺어서인지 경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선시불심 교시불어(禪是佛心 敎是佛語)’라 했습니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참선도 열심히 해야 하고 경도 부지런히 익혀 부처님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서상 먼저 교를 알고 선에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부처님이 가르치신 근본이치를 알아 그것이 든든한 밑받침이 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와 선을 자동차의 양 바퀴처럼 굴려야 합니다.
해인사 선방에서 두철을 지내고 대승사 수덕사 금강산 표훈사 유점사를 두루 다니며
운수행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점사에는 강원만 있고 선원이 없어 만공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선방을 내자고
공론이 되어 내가 공식 사찰공문을 들고 만공스님을 찾았습니다.
스님은 마침 금강산을 둘러본 적이 없다 하시며 쾌히 승락을 하시어
여름안거후 유점사에 오셨습니다.
그때 모시고 수행을 한 것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그때 큰스님들은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밝혀서 원래 맑고 밝은 자성의 본체를
깨달아 청정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강조하시며
부지런히 닦을 것을 자나깨나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도 겪었듯 그일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정진중에는 온갖 망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망상이 생길때 망상을 없애겠다는 집착을 보이면 오히려 더 힘들어집니다.
망상은 망상대로 내버려 두고 화두를 놓치지 말고 계속 들어야 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잡념이 다 생기지만 망상이 오거나 말거나 계속 화두에 몰두해야 합니다.
마치 파도가 일고 비바람이 거세게 쳐도 노를 잡은 뱃사공이 유능하면
제 갈길을 결국은 갈 수 있듯 화두를 잡은 마음이 확고해야 자신을 잡을 수 있습니다.
내 책상에는 <보현행원품>을 비롯 몇가지 경전이 늘 놓여 있습니다.
수시로 보며 독송하기 위해섭니다.
부처님 제자라면 불경을 하루에 한시간이라도 매일 규칙적으로 읽거나
염불을 하거나 좌선을 할 것을 권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마음이 저절로 순화됩니다.
수행을 통해 마음이 순화되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기쁘고 편안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끼쳐서 이웃이 편안해지고
나라가 편안해지고 세계가 화평해집니다.
상대방이 나를 보고 찡그린다면 상대방의 마음이 편안치 않다고 보기보다는
나의 마음이 편안치 못하다고 봐야 합니다.
곧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으면 ‘복많이 받으십시오’라는 덕담들을 흔히 하지요. 나도 새해에 그러한 인사를 많이 듣습니다.
요새 어떤 불자들은 ‘복많이 지으십시오’ 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복은 그냥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치(愚癡)를 다스리고 자비심으로 분노심을 다스리면 복은 저절로 찾아듭니다.
우리들 모두는 복전(福田)을 가지고 있습니다.
밭에다 씨앗을 심고 정성을 다해 가꾸면 온갖 작물이 자라듯 마음의 밭에 선행을 심으면
복이 풍성하게 열립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8복전을 가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 샘을 파서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일
△깊은 내가 있는 곳에 다리를 놓아서 쉽게 건너갈 수 있게 해 주는 일
△험한 길을 잘 닦아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오고 갈 수 있게 만드는 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잘 봉양하는 일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공경, 공양하는 일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일
△법회를 열어서 누구나 법문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일
이중의 어떤 것이라도 큰 복을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보다 더 큰 복이 있습니다.
마음을 깨우친 복, 깨달음을 얻어서, 짓고 받는 복입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삼천대천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하더라도 이 경의 사구게 한구절만이라도 받아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주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글을 줄줄 읽어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 본뜻을 확연히 깨닫거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틔워주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가장 큰 복입니다.
새해에는 이러한 복짓는 일을 많이 하십시다.
출처: 법보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