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잡기

전라남도 꽃 구경 2박 3일: 11. 담양 소쇄원과 가사문학관 그리고 지실마을 계당매

무애행 2017. 4. 20. 11:57

2017년 3월 30일(목), 낮에 해가 나면서 날씨가 풀림



선암사 앞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기온이 많이 올랐다. 전남대 안에 있다는 '대명매'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버리고, 담양 일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먼저 가사문학관과 소쇄원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가사문학관 근처에 지실마을 계당매, 식영정 부용당 등이 몰려있어 걸어다녀도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소쇄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 입었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지금은 공사중이어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온 대학생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제주양씨소쇄원, 이왕 돌에다 새길 때 좀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늘높이 솟아 있는 울창한 대나무 숲은 주변을 약간 어둡게 하는 효과가 있다. 입구의 죽림을 지나 소쇄원 안쪽으로 들어오니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는 것만 같다.

 

작은 연못(上下池중 아래 연못)에 올챙이들이 보인다. 대나무를 잘라 그 안쪽으로 물이 흐르도록 홈을 파 놓았다.

  






건너편 양지바른 곳에 있는 아래 전각 광풍각(光風閣)은 보수작업이 진행중인 듯! 그 위는 제월당(霽月堂)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C%87%84%EC%9B%90

소쇄원(瀟灑園)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원이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자연미와 구도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힌다. 1983년 7월 20일에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 5월 2일에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 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정원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아래는 중복된 감이 있지만, 현지 안내도의 글과 담양군청의 소개글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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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瀟灑園)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號)인 소쇄옹(蘇灑翁)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五曲門)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齊月堂: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光風閣:비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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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our.damyang.go.kr/board/view.damyang?boardId=BBS_0000078&menuCd=DOM_000002701001001000&startPage=1&dataSid=33177&tabIdx=0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에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 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또 당 앞에는 빈 마당이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당시에 이곳에 심어진 식물은 국내 종으로 소나무, 대나무, 버들, 단풍, 등나무, 창포, 순채 등 7종이고 중국 종으로 매화, 은행, 복숭아, 오동, 벽오동, 장미, 동백, 치자, 대나무, 사계, 국화, 파초 등 13종 그리고 일본산의 철쭉, 인도산의 연꽃 등 모두 22종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 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았다. 

제월당(霽月堂)은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광풍각(光風閣)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역시 팔작지붕 한식이다. 정원의 구조는 크게 애양단(愛陽壇)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광풍각(光風閣)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가적(道家的)인 색채도 풍겨나와 오암(鰲岩), 도오(桃塢), 대봉대(待鳳臺) 등 여러 명칭이 보인다. 제월당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 「소쇄원사십팔영시(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게액되어 있으며, 1755년(영조 31년)에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소쇄원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 때 소쇄원에서 꼭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소쇄원제초정(瀟灑園題草亭)』에는 자기가 태어나던 해(1536)에 소쇄원이 조영된 것이라 하였다. 1542년에는 송순이 양산보의 소쇄원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 개인이 꾸몄다기보다는 당나라 이덕유(李德裕)가 경영하던 평천장(平泉莊)과 이를 모방한 송순, 김인후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에는 소쇄원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 있어 당시 소쇄원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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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지붕을 한 작은 정자 안에는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待鳳臺)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어 담벼락에는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 라는 글씨가 각기 다른 서체로 달려 있다.






오곡문(五曲門) 근처에는 담벼락이 터져 있어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 담 밑으로는 계곡물이 그대로 흐르도록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담장을 만들었는데, 지금 담벼락이 터진 곳에 있던 문을 오곡문이라 했다는 말도 있다(사실이라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다는 말이 있어야 할 텐데).


계류를 건너는 다리 위에서 포즈를 취하는 학생들! 





담벼락이 터져 있는 곳으로 나가보니 우물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 물로 차를 끓여 마셨겠지?





제월당(霽月堂) 마당과 마루에는 이미 학생들로 만원이다.









제월당(霽月堂) 마루 한가운데 앉아 봤다. 바람이 시원하다.







소쇄원 구경을 한 다음 우리는 가사문학관으로 이동했다. 매표소의 남자직원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우리에게 몇가지 설명을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실마을 계당매의 위치다. 가사문학관 왼쪽 뒤편에 있는 문으로 나가 동네에 있는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고 한다.




가사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햇살이 퍼지는 곳에 '할미꽃'이 피었다. 어려서 듣기로는 '할머니 산소' 근처에서 많이 핀다고 해서 할미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꽃대가 구부러져 허리가 굽은 할머니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고도 했다.















가사문학관 전시실이다.

나는 여기서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에 갔을 때만큼의 충격을 또 받았다. 불과 200~400년전에 우리 조상들이 쓰던 글인데, 제대로 읽을 수가 없네! 







이 곳 주변에 있는 정자와 편액 등에 대한 설명이 있다.









아울러 가사문학의 대가인 '면앙 송순'과 '송강 정철'에 대한 설명 등이 보인다.






지실마을 계당매를 보러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맷돌인가?




가사문학관 왼쪽 뒤편에 난 문을 나가서 화살표 방향으로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마을에는 봄색이 완연하다.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나무 둘레에 새끼줄을 겹겹이 둘러놓은 것을 볼 때, 아마도 마을 수호신 정도 되지 않을까? 수령이 300년이 넘었으며, 담양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음)를 보면 왼쪽으로 돌아 개울을 따라간다. 근처에 마을회관이 있으므로 길 잃을 일은 없을 것이다(바람소리 라는 안내판을 보고 따라가도 된다).












저 앞에 보이는 나무(개울 왼쪽)들이 계당매(溪堂梅)다.

그런데 여기 매화는 이제 막 피어나려 하고 있다. 나가는 길에 가사문학관 매표소 직원에게 '전남대 대명매는 만개했다던데, 여기는 이제 피려 한다'고 말했더니, 이 곳이 광주보다 3~4도 정도 기온이 낮아서 그렇다네.


호남 5매의 매화꽃을 모두 제대로 보려면 전라남도에 와서 1주일 정도는 머물러야 하겠구나.


여기 송강 정철의 후손이 살고 있고, 그 안에 계당(溪堂)이 있다고 들었는데 막상 대문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사진으로 미루어, 매화나무 뒤편에 보이는 기와집이 계당으로 생각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대나무 숲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한마리를 발견했다. 






이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하다.

집사람에게 '여기 살아볼까?' 했다가 한대 맞을뻔 했다. 




다음에 들른 곳은 식영정(息影亭)이다(가사문학관 주차장에서 150m).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8978&out_service=Y

* 송강 정철 “성산별곡”의 탄생지, 식영정 *

식영정은 원래 서하당 김성원이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각이라 전하며,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으로 임억령이 지었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棲霞堂)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었으며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복원되었다. 『서하당유고』행장을 보면 「경신 공삼십육세 축서하당우창평지성산 위종노계…(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 爲終老計…)」란 기록이 있다. 위 기록에 의하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1560년) 식영정과 서하당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하당 김성원은 송강의 처외재당숙으로 송강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송강이 성산에 와 있을 때 같이 환벽당에서 공부하던 동문이다. 환벽당은 식영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 송강 정철의 가사 문학이 숨어있는 곳 *

송강 정철은 성산을 무대로 하여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등 당대의 명유들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귀봉 송익필 등과 교우하면서 시문을 익혔다. 이곳은 식영정 외에도 풍광이 수려하여 유상지(遊賞地)로도 이름난 곳이 많은데 자미탄(紫薇灘), 견로암(鵑로岩),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부용당(芙蓉塘), 서석대(瑞石臺)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광주호가 생겨 일대가 많이 변형되었으며 부용당 터에 부용당 건물을 최근 새로 지었다.

송강은 이 성산에서 「성산별곡」이외에도 식영정20영을 비롯하여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차환벽당운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정각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 인데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깔았다.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식영정에 올라 











식영정 뒤편에 있는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詩碑)




성산사(星山祠)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부용당(芙蓉塘)



서하당(棲霞堂)



담양 10정자에 관한 글인데, 송강집 목판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장서각은 저 안쪽에 있나?


https://tour.damyang.go.kr/index.damyang?menuCd=DOM_000002701001003000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松江亭)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으며『성산별곡』을 창작해냈던 것이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藏書閣)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星山別曲) 시비(詩碑)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