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원스님께서는 인월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금대산에 있는 금대암*을 들렀다 가는 게 어떠냐고 하셨는데, 알아보니 길이 좁아서 우리가 타고 온 버스가 올라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접고 그냥 실상사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60번 도로 큰 길에서 금대암까지 2.5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다녀오려면 서너시간 가까운 시간을 배정해야 할 뿐더러, 이 날 기온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행여 같이 간 신도님들이 일사병에라도 걸리면 큰 일이다 싶었다.
* 금대암은 지리산 주능선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그리고 실상사를 참배한 후 실상사 말사로 있는 백장암의 백장선원을 방문할까도 생각했지만, 역시 이 곳도 버스가 올라가기에는 무리인 데다가(큰 길에서 백장암까지 1.1km) 시간도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곧바로 의정부로 돌아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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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의 역사 개관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 전쟁'시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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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도 버스는 안쪽으로 통행할 수 없기 때문에 길 가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걸어간다.
임천에 놓인 해탈교 바로 앞에, 걸어들어가는 방향으로 왼쪽과 오른쪽에 돌 장승이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 장승은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원래 한몸은 아니었나 보다. 돌의 색깔이 다르다) 누워있다.
해탈교를 지나서도 장승이 한쌍 있다.
실상사 천왕문에 들어가기 직전 북쪽을 바라보니, 2013년 10월에 친구들과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을 때 지나갔던 기억이 살짝 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어느쯤에선가 카메라 렌즈에 손이 닿았나 보다. 사진이 흐릿하게 보인다.
실상사 보광전을 참배한 후 보살님들이 약사전과 명부전을 거쳐 그늘에서 잠깐 쉬는 사이, 나는 증각홍척국사 응료탑과 응료탑비가 있는 곳을 다녀왔다.
실상사까지 3절을 하루에 참배한 우리는 곧바로 의정부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는 오고 갈 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뜻깊은 행사가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애써주신 제월 주지스님과 정혜사 신도 여러분, 특히 대중공양반 회원들께 신도회장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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