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무애

[스크랩] 봉선사

무애행 2014. 1. 13. 20:44

교종 수사찰(敎宗 首寺刹)  봉선사(奉先寺)

 

전국 제일 수림(樹林) 국립수목원 초입에 자리잡은 봉선사(奉先寺)...봉선사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55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969년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예종 1) 정희왕후(貞熙王后) 윤씨가 광릉(光陵)의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 6)에는,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기도 하고, 전국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敎學)진흥의 중추적 기관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여러 번 수축했으나, 1951년 6 ·25전쟁 때 다시 법당과 함께 14동 150칸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화엄(華嚴)이 56년 범종각을, 1961~1963년에 운하당(雲霞堂)을 세우고, 1969년에는 주지 운허(耘虛)가 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月雲)이 영각(靈閣)을 세웠다. 절 종각에 보존되어 있는 동종(銅鐘)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선사를 부르는 애칭은 교종의 수사찰, 교종의 갑찰, 역경의 산실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으며, 가람의 초입부터 대찰로서의 위용을 보이는데, 단연 가람 역시 세조의 능침사찰로서 위엄을 가지고 있다.

 

봉선사가 자리한 운악산은 1927년에 편찬된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봉선사지(奉先寺誌)」조에 한국의 5대 명산 중(동쪽 금강산, 서쪽 구월산, 남쪽 지리산, 북쪽 묘향산, 중앙 운악산)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또한 중국의 五岳을 모방하여 경기지방에도 五岳을 설정하였는데 개성의 송악(松岳), 과천의 관악(冠岳), 연천의 감악(紺岳), 가평의 화악(花岳) 등과 함께 봉선사가 있는 양주의 운악(雲岳)이라 하였다.

 

현재 운악산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울창한 산림이 있고, 다양한 수종의 동식물 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창건된 봉선사와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世祖)와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모신 광릉(光陵)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운악산에 자리한 봉선사는 고려시대 창건이후 조선시대 초에 이르기까지 절의 역사를 전하는 자료가 없어 어떤 종파에 속하고, 어떤 사상적 특성을 지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469년(예종 1) 세조의 妃인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크게 중창되면서부터이다. 이때에는 1424년(세종 6) 7개의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조직한 이후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머무르는 사찰로서, 또한 세조의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지정되어 원찰(願刹)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551년(명종 6)에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교종의 승과고시(僧科考試)를 치르고, 승려들이 모여 교학을 익히는 도량으로 변모를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오늘날 봉선사는 한국불교에 있어 교종의 대본산(大本山)으로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790년(정조 14) 정조에 의해 용주사가 창건되면서 불교가 부흥되기도 했는데, 이 때 봉선사는 전국 5糾正所의 하나로 지정되어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리하였다.

 

1902년에는 원흥사(元興寺)가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 되면서 봉선사는 전국 16개 수사찰 가운데 하나가 되어 경기도내의 본산이 되었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 시행으로 전국사찰이 31본산 체제로 나눌 때 교종본산(敎宗本山)으로 지정되어 경기도내 23개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196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가 된 이후 17개 지역 72개 사찰을 관장하며 경기 북부 지역의 불교진흥에 힘쓰고 있다.

 

봉선사가 오늘날 ‘교종 대본찰(敎宗 大本刹)’로서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현대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데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한 월초(月初) 스님과 한국불교역경사에 있어 빛나는 업적을 남긴 운허용하(耘虛龍夏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1551년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된 이래 머물렀던 수많은 교종판사(敎宗判事)들과 근대의 월초스님, 현대의 운허스님의 노력은 오늘날 봉선사를 교종대본찰(敎宗 大本刹)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학교법인 광동학원

1946년 운허스님이 광복된 조국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었이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상의한 끝에 교육사업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자는데 합의하여 세운 교육시설이다.

봉선사, 봉영사, 흥룡사, 현등사, 수국사 등 5개 사찰의 주지가 각기 자기 사찰의 토지와 임야를 내어 토지 46만평과 임야 1600정보로 광동학원이 설립되었다.

광동학원은 2012년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장현리 603-5번지에 광동중학교 25학급 918명과 남양주광동고등학교 30학급 1224명을 수용하고 있으며, 또한 회룡사 협조로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1동 110번지에 의정부광동고등학교를 설립하여 30급, 1,112명을 수용하고 있다.  

 

 

가람배치

 

봉선사는 1469년(예종 1) 세조의 능침사찰로 지정되고,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중창되었을 때에만 해도 모두 89칸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사세(寺勢)속에 1551년(명종 6)에는 교종의 수사찰로 선정되어 많은 승려들이 모여 교학(敎學)을 공부하던 도량이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7년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가 편찬될 무렵 만해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중건된 웅장한 가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남아있던 전각들은 대웅전, 향로전, 삼성각, 어실각, 운하당, 방적당, 진영당, 열반당, 진여문, 천왕문, 해탈문, 청풍루, 소설루, 판사실, 곽사, 동사 등이다.

그러나 이런 대가람이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1956년에 화엄 스님이 범종각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운허 스님, 운경 스님, 능허 스님, 월운 스님 등이 복구를 하여 지금의 봉선사로 일신하였다.

봉선사에는 현재 큰법당을 중심으로 지장전, 관음전, 삼성각, 조사전, 개건당, 청풍루, 범종각, 일주문, 방적당, 다경실, 동별당, 서

별실, 판사관무헌, 선열당 등의 전각들이 늘어서 있다.

가람은 일주문은 시작으로 좌우로 유치원과 연지가 있는 숲길을 지나 청풍루에 이르는데, 청풍루 좌우로 범종각과 동별당, 우물터가 자리하고 있으며, 청풍루를 지나 큰법당있는 중정이 나온다.

중정은 교종의 수사찰의 위엄을 보여주듯 정연된 축대 위에 장대하게 가람이 들어 서 있는데, 남향한 큰법당은 중심으로, 좌우로 지장전과 관음전이 있으며, 요사채로서 방적당과 판사관무헌, 선열당이 중정을 감싸듯 들어 서 있다.

이외 큰 법당 뒤로는 개건당과 조사전, 그리고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봉선사 연혁 

 

 

봉선사 전각들

 

일주문 - 봉선사 초입에 있는 정면 4칸짜리 일주문으로 철안스님이 2005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건물은 장방형으로 치석한 낮은 화강암을 기단 삼아 그 위로 석주를 세워 두리기둥을 받친 모습으로, 창방ㆍ평방 위로 외4출목의 다포를 올인 모습이다. 건물은 교종 수사찰의 위엄을 보여주듯 금단청으로 장엄하고, 어칸에 '운악산 봉선사' 편액과 '교종본찰봉선사'라는 편액을 봉안하였다.

 

봉선사 부도 및 비석

 

연꽃유치원- 1993년 봄 봉선사 경내에 들어선 유치원으로 일주문을 지나 세워진 현대식 건물이다.

이는 1992년에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사는 연담거사 문창섭(文昌燮)씨가 유치원건립기금 1억 5천만원을 희사해 준것을 토대로하여 이상현 회장의 5천만원과 여러 신도들의 동창금, 사중불사수익금을 토대로 지하 1층 60평, 지상 1, 2층 120평, 3층 45평의 규모로 세워진것이다. 현재 연곷 유치원은 4학급 140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유치원으로 인근 지역어린이들의 정서 교육에 힘쓰고 있다.

봉선사 연지

 

봉선사 연지

 

봉향각

 

봉선사 우물

 

 

 

청풍루

 

봉선사 청풍루

6.25사변 전에 천왕문과 해탈문, 그리고 소설루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112평의 대형 누각으로, 1980년 봉선사 신도들의 조약돌모으기 불사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건물로, 1층은 종무소겸 사무실로, 2층은 설법전으로 사용되며, 1층 통로에는 사천왕탱과 금강탱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사면에 걸쳐 4기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남쪽에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賢)이 쓴 청풍루 편액이 걸려 있고, 북쪽에는 시암(是庵) 배길기(裵吉基)선생이 쓴 설법전 편액이, 서쪽에는 심은(沁隱) 전정우(全正雨)가 쓴 불천회관이, 동쪽에는 진성(眞性)스님이 쓴 중해운집(衆海雲集)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주련은 운허 큰스님의 뜻을 본받아 우리말 게송으로 지었는데, 게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쪽 설법전 밑의 6기의 주련-한암정수(閑庵正修)스님이 씀.

묘담하신 수능엄왕께서

감로법을 말씀해주시사

우리들로 법신얻게 하시니

법신의 모습이 어떠하던가

아침마다 동녘햇살 밝고

문전마다 장안길 훤하다.

동쪽 중해운집 밑의 4기의 주련-눌암동안(訥庵東眼)스님이 씀.

범부와 성현이 모여서

모두가 무위의 법 닦아

마음이 공해 급제하니

여기가 선불장일런가

남쪽 청풍루 밑의 6기의 주련-마하(摩訶) 선주선(宣柱善)씨 씀.

맑은 바람 부는 아침

밝은 달 비치는 저녁

여기서 무엇을 할꼬

염불참선 모두 좋다.

어떠한 공덕 있을까

종소리 누리에 퍼지네

서쪽 불천회관 밑의 4기의 주련-고담태전(古潭太定)스님이 씀.

목마르면 맑은 물 마시고

심심하면 솔그늘 거닐으소

여기에 무진장 갖추었음을

그대 반긴 부처님의 뜻이라오.

청풍루의 모든 편액과 주련 조각은 지장사(地藏寺) 도서(都序)스님이 하였으며, 단청과 벽화는 하정거사(霞亭居士) 박정원(朴貞元)이 조성하였다.

 

봉선사 객실

범종각

 

범종각

 

 

봉선사 대종 (보물 제397호)  

봉선사 동종은 1469년 8월 절의 중창이 완료되기 한달 전 세조의 명복을 빌기위해 조성하였다. 종이 조성된 이후, 오백여 년 동안을 한자리에 서서 성쇠의 역사를 지켜보았던 종이다. 이 범종은 범종의 양식만이 아니라 조선 초기 조각사를 살피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이 대종은 임진왜란 이전의 몇 개 안 되는 조선 전기 동종(銅鍾)의 하나로, 1469년(예종 1년) 왕실의 명령에 따라 주조된 종이다.

 

이 종은 전체적으로 종신의 폭이 좁고 정상에는 음관(音管 음통)이 없이 쌍룡으로 용뉴만 있다. 용뉴는 쌍룡이 양쪽 머리를 반대방향으로 돌렸는데 꽉다문 입과 코, 머리위의 뿔 등이 웅건한 모습이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이 없는  용뉴를 나타내고, 종의 어깨에는 겹연꽃잎을 돌렸다. 그 바로 밑으로 도드라진 2가닥의 띠를 돌려서 몸체와 뚜렷이 구분하고, 종의 몸체 중앙에는 굵고 가는 3가닥의 띠를 돌려 위아래로 구분하였다. 

 

이 종은 종신의 윗 부분에는 4개의 유곽과 4인의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되었고 그 상하 여백에는 범자(梵字)를 새겼다. 4개의 유곽은 종의 어깨에서 분리되어 당초문으로 장식되고 그 안에 연꽃으로 된 유두 9개를 갖추고 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원형두광(圓形頭光)을 갖추고 양손을 마주 잡은 보살입상 4구가 양각되어 있다. 보살상은 정교하고 가는 선으로 양각한 보관과 천의, 각종 장식구들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유곽 밑과 중앙의 띠 사이 공간에는 범자(梵字)가 4자씩 새겨져 있고, 보살상의 위아래, 네 귀퉁이에도 같은 형식의 범자가 새겨져 있다.

 

종신의 중앙에는 3개의 굵은 선을 양각하여 구획을 나누고 그 아래에 명문을 가득 적었다. 종신의 아래부분에는 2개의 선을 둘러 하대를 이루고 이 안에 파도문양을 새겼다. 종신의 맨 아래 부분에는 종을 치는 당좌가 없어 타종의 흔적이 하얗게 남아 있다. 

 

 종신에 가득 새긴 명문에는 조성에 관여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 등이 나열돼 있어 금속공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종명은 당대에서 시.문.서.화의 4대가 불리던 강희맹(姜希孟, 1424 - 1483) 이 짓고 명필로 손꼽히던 정난종(鄭蘭宗, 1433 - 1489) 이 써 그 문장의 아름다움과 글씨의 유려함이 극치를 이룬다. 보물 제 397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230cm, 입지름 168cm, 두께 23cm이다.

 

명문에 적힌 글귀 중에서 한 부분을 옮겨보면 '종소리가 사바세계에 울려 퍼짐에 참답고 진실한 교법이 일어나느니, 이 종으로서 하루에 여섯번씩 울려 경계하노라. 어찌 도닦는 사람만이 자신을 성찰하리오. 저 육도의 중생들에게는 괴로움이 그치는 소리가 되리라.'

 

이 명문으로 주종(鑄鍾) 이유와 화원, 鑄成匠, 彫刻匠, 注匠, 刻字木手, 爐冶匠, 水鐵匠, 使令 등의 인명이 열기(列記)되어 대대적인 주종공사였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전체 높이는 238㎝이고 입지름이 168㎝, 두께가 23㎝이다.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봉선사종명(奉先寺鐘銘)

奉先寺鐘銘 奉先寺鍾銘幷序 推忠定難翊戴功臣崇政 大夫行刑曹判書兼 經 筵知事晋山君姜希孟 奉 敎撰 嘉靖大夫行虎賁衛大護

軍兼春秋館同知事臣鄭 蘭宗奉 敎書 恭惟 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之德 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殿下龍飛九五光御金輪神化

旁治民物熙 積十有四年矣 臣民無祿奄爾 禮陟今我 主上殿下孝思罔極終天慕遠稽彛 典於禮經 玄宮於坎隅 於其傍營利資福曰

奉先寺鎔銅洪鐘 命臣作銘臣竊惟鐘之爲器道具 之最厥聲 容警遠懼邇上徹 有頂下該六塗 王受輪夢求 長擊提婆再鳴大興眞敎今以

是鐘警于六時豈特道侶發其 深省迷倫息其苦趣必將冥達 玄宮頓增佛知矣於戱我 世祖大王功德之盛興夫我 嗣王殿下誠孝之極所以輝映萬古 者不可不托諸鏞鐘以振耀於 無窮焉臣希孟謹拜手稽首而 銘曰園陵開寶刹金碧聳觴嶸法樂 震人天妙音諧幽明上至阿加可

橫遍恒河沙度盡無邊生福 利成無遮 列聖登正覺盤石固邦家山平海可 竭功德終不磨 成化五年七月日 鑄成定略將軍行義興衛司猶 金德生 畵員 朝奉大夫 李百連 宣敎郞 金仲敬 鑄成匠 鄭吉山 李波廻 李命仇知 吳春敬 彫刻匠 張今音同 金勿金 注匠 李乙夫 張石京

朴守生 金上佐 金君乙未 金德連 車季山 安德銀 吳守山 李吾正 邊松阿之 刻子 金順生 鄭春發 姜介未致 金末叱同 木手 咸毛里 張觀音老 爐冶匠 金蒙寵 朴吾乙未 玄得富 水鐵匠 姜元奇 李達磨 朴山守 沈文 金貴山 高他乃 金龍 金春敬 朴有生 高四萬 尹石乙伊

姜成敏 朴承通 金奇 金守 金思仲 崔彦 崔末生 金珍 朴石乙伊 李叱同 林石 使令 趙承守

 

봉선사종명

봉선사종명과 서

추충 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행형조판서 겸경연지사(行刑曹判書兼經筵知事) 진산군(晋山君) 신 강희맹(姜希孟)은 교지를 받들고 찬하고, 가정대부(嘉靖大夫) 행호분위 대호군 겸 춘추관 동지사(行虎賁衛大護軍兼春秋館同知事) 신 정난종(鄭蘭宗) 교지를 받들어 쓰다.

공손히 생각해 보건대, 세조대왕께서는 자유롭고 장엄하시며 하늘을 공경하시며 도의를 본받아 문장이 특출하게 아름다우시며, 무예도 뛰어나시고 덕이 지극하며, 공로 또한 융성하시며 신성하시고 명철(明哲)하시며, 공손하면서도 엄숙하시고, 어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대왕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시어 더욱더 오색(五光)이 찬란한 금륜(金輪)을 타시고 정사를 하시어 신성한 교화가 사방에 미쳐서 백성들이 기쁘고 안락하게 살 수 있게 된 지가 14년이 되었다. 백성들이 복이 없어 홀연히 임금께서 승하(禮陟)하시니 이제 우리 주상전하께서 효행하는 마음이 지극하시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사모하시며 인간의 옳은 법을 예경(禮經:예기)에서 살펴보시고, 북쪽모퉁이에 현궁(玄宮)을 지어 기거하시며, 곁에 사찰을 지으시고 복을 쌓으며 봉선사에서 구리를 녹여 큰 종을 만드시고, 신에게 명령하시어 종명(鐘銘)을 짓도록 하시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종이란 그릇은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기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니 그 소리가 웅장하고 웅장하여 먼데서도 두려워하고 가까운 곳에서도 경계하여 위로는 수미산정상에 통하고, 아래로는 육도(六塗:地獄·餓鬼·畜生·修羅·人間·天上)에까지 미친다. 타왕이 법륜을 받자와 꿈속에서 길이 종소리가 끊이지 않기를 바라며, 세바천(提娑)에 다시 울려퍼짐에 참다운 진실한 교법이 일어나느니 이 종으로서 하루에 여섯번씩 울려 경책하니 어찌 다만 도닦는 친구들이 그 깊이 자신을 살피는 마음을 일으킬 뿐이리요. 저 육도의 중생들에게 괴로움을 쉬도록 하기도 하나니, 받드시 장차 현궁에까지 깊이 미쳐서 부처님의 지혜를 점점 더 해 가게 하리라.

아! 참으로 아름답도다! 우리 세조대왕의 훌륭한 공덕이시여! 우리 후대를 이으실 왕전하시여! 지극한 본성이 만고에 깊이 빛나게 하려면, 저 용종(鏞鐘)에 의탁하여 한없이 무구한 세월을 광명이 떨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신 희맹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옵고 비명을 지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원릉(園陵:임금의 능)에 보찰(寶刹)을 지으시니 황금색 푸른색이 우뚝하게 솟아 있도다. 법의 즐거움이 인천(人天)에 떨치고, 미묘한 법음(法音)이 지옥 깊이깊이 사무치도다. 위로는 아가타(阿加 )에까지 이르고, 옆으로는 항하사(恒河沙)에까지 두루 퍼지는구나. 한없이 중생을 모두 다 제도하여 복리(禮利)가 무차(無遮:寬容廣大)를 이루리로다!

성열(聖列께서는 등각(登覺)을 이루시옵고 국가는 반석처럼 길이 견고하소서. 산이 평지가 되고 바다가 마를지언정 공덕이 끝내 멸하지 마옵소서.

성화(成化) 5년(1469) 7월 일

주성정략장군(鑄成定略將軍) 행의흥위사유(行義興衛司猶) 김덕생(金德生)

화원(畵員) 조봉대부(朝奉大夫) 이백연(李百連) 선교랑(宣敎郞) 김중경(金仲敬)

주성장(鑄成匠) 정길산(鄭吉山) 이파회(李波廻) 이명구지(李命仇知) 오춘경(吳春敬)

조각장(彫刻匠) 장금음동(張今音同) 김물금(金勿金)

주장(注匠) 이을부(李乙夫) 장석경(張石京) 박수생(朴守生) 김상좌(金上佐) 김음을미(金音乙未) 김덕연(金德連) 차계산(車季山) 안덕은(安德銀) 오수산(吳守山) 이오정(李吾正) 변송아지(邊松阿之)

각자(刻字) 김순생(金順生) 정춘발(鄭春發) 강개미치(姜介未致) 김말질동(金末叱同)

목수(木手) 함모리(咸毛里) 장관음노(張觀音老)

노야장(爐冶匠) 김몽총(金蒙寵) 박오을미(朴吾乙未) 현득부(玄得富)

수철장(水鐵匠) 강원기(姜元奇) 이달마(李達磨) 박산수(朴山守) 심문(沈文) 김귀산(金貴山) 고타내(高他乃) 김룡(金龍) 김춘경(金春敬) 박유생(朴有生) 고사만(高四萬) 윤석을이(尹石乙伊) 강성민(姜成敏) 박승통(朴承通) 김기(金奇) 김수(金守) 김사중(金思仲)

최언(崔言) 최말생(崔末生) 김진(金珍) 박석을이(朴石乙伊) 이질동(李叱同) 임석(林石) 사령(使令) 조승수(趙承守)

 

 

 

 

판사관무헌(判事官務軒) -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8년에 복원하였다. 어실각(御室閣)으로 인해 봉선사 주지는 조선 왕실로부터 봉향판사(奉香判事)의 작위를 수여 받았는데, 판사관무헌은 역대 봉향판사(주지)가 머물던 곳이었다. 

 

방적당(放跡堂) - 운하당 맞은편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8칸의 팔작건물로, 1973년에 만허스님이 주지일때 정씨문수행의 도움으로 신축된 건물이다. 'ㅁ'자형의 건물로, 구조는 철조콘크리트이며, 규모는 48평이다. 현재 스님들이 수행하는 큰방과 스님들의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의 거처인 조실스님이 주석처로 알려 져 있으며, 건물 서쪽에 운봉 김인석이 쓴 방적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방적은 발걸음을 좀 자유롭게 놓아 준다는 뜻으로서 스님들이 첫단계의 수행을 마치고 다시 다듬는 분들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대웅전 큰법당 -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0년 운허스님에 의해 건립되었다. 일반적으로 석가여래를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불교대중화에 盡力하신 운허 스님의 뜻에 따라 '큰법당'이라 이름하였다. 내부에는 금동석가여래좌상과 문수·보현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석가모니후불탱, 신중탱, 반자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3면 벽에는 한글 화엄경 동판(銅版)125매, 한문 법화경 동판(銅版) 227매를 부착해 놓아 교학(敎學)의 봉선사가 산실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편액을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법당이라 한 것은 운허스님께서 현실적으로 대웅전을 큰법당이라 부르는 예에 따라 분부하신이로서 운봉(雲峰) 김인석이 썼다. 주련은 80화엄 제 80권에 있는 보현보살의 게송으로 한글대장경에서 뽑아 쓴것이다. 주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온누리 티끌세어서 알고 / 큰바다 물 모두 마시고 / 허공을 재고 바람얽어도 / 부처님 공덕 다 말 못해 -

단청은 중창 당시에 혜각스님이 하였고, 외부벽화는 1985년에 박정원씨가 했다.

 

 

 

 

지장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9년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원래 어실각(御室閣)으로서 세조대왕과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건물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후 정부의 지원으로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하여 지장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내부에는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무독귀왕·시왕 등 명부권속과 1999년에 금어 박정원씨에 의해 조성된 지장탱을 봉안하였다.

 

개건당 -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봉선사를 창건하여 開山한 개산대공덕주 정희왕후 윤씨와, 중건공덕주인 계민(戒敏)선사, 정문수행(鄭文殊行)을 모시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조사전을 건립하면서 이곳은 스님 외의 인물들을 모시는 전각으로 바꾸었고, 현재는 봉선사의 중건공덕주인 정문수행(鄭文殊行)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조사전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7년 대시주 정보현행의 도움으로 삼성각과 동일한 규모로 지어서 원래는 ‘개건당’으로 사용하였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그 아래쪽에 새로이 개건당을 짓고 이곳은 조사전으로 장엄하여 월초 스님을 비롯한 근대의 봉선사 조사스님들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月初 스님이 1926년에 건립한 이후 봉선사에서 한국전쟁 때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전각이다. 건물의 정면에는 ‘북두각(北斗閣)’, 독성각(‘獨聖閣)’, ‘산령각(山靈閣)’ 등의 현판을 달았으나 일반적으로 삼성각으로 부르고 있다. 내부에는 1903년 원흥사(元興寺)에 봉안했다가 옮겨온 칠성탱과 독성탱, 그리고 1973년에 조성한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다경실

범종가 좌측 언덕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건물로 현재 조실스님이 월운스님의 거처이다. 1978년 정씨보현행의 시주로 애월재(僾月齋)가 있던 자리에 운허스님의 퇴로지처(退老之處)로 지은것이다. 다경(茶經)이란 차마시고 경 읽는다는 뜻이니 고래로 다로경권실(茶爐經卷室)이란 말에서 유래된것인데, 운허스님께서 입주하실 때 경문거사(慶文居士) 이석정(李石情)씨의 글씨와 각을 받아 붙이신 것이다. 현재 건물 내부에는 운허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에 능엄대도량(楞嚴大道場)이라는 현판이 있다.

 

 

 

 

 

 

 

 

  

 

 

출처 : 대한불교청년회 불교공부방
글쓴이 : 무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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