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 이야기

베트남 4일차 - 하노이 시내구경(문묘)

무애행 2014. 1. 29. 12:25

베트남 하노이여행기(2013.12.2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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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정 요약: 하노이 시내 자유관광

 - 08:00 아침, 짐 싸서 호텔에 맡기고 09:20 호텔 출발(도보), 여행사에 들러 모자를 찾은 후 호수쪽으로 이동

 - 09:40 호안끼엠 호수안에 있는 덴 응옥썬(옥산사)관람후, 10:40 리따이또 황제상앞 도착

 - 11:05 오페라하우스를 거쳐, 11:10 혁명박물관 도착(~11:50)

 - 11:55 역사박물관내 식당에서 점심, 13:30 관람시작(~14:20)

 - 약을 먹으러 호텔로 돌아왔다가, 택시를 타고 문묘로 이동

 - 15:15~16:06 문묘 관람, 택시를 타고 서호로 이동

 - 16:20~16:50 서호안에 있는 진국고사 관람, 택시를 타고 호텔로 이동

 - 17:10 호텔도착, 짐시 쉬었다가 맡긴 짐을 찾아 18:30 택시를 타고 베트남항공 건물로 이동 

 - 19:00 '하'를 만나서 인근 식당에 가서 저녁(~20:20)

 - 20:30 택시를 타고 노이바이국제공항으로 이동, 베트남항공편(VN416)으로 서울로 출발 

 

2. 비용: $47 + 99.2만동

 - 입장료 : 옥산사 4만동(2*2), 혁명박물관 4만동(2*2), 역사박물관 4만동(2*2)<카메라소지 1.5만동 별도>, 문묘 2만동(1*2)

 - 점심(역사박물관내 식당) 32.4만동, 호텔에서 맥주 1.5만동

 - 택시: 호텔~문묘 6만동, 문묘~서호(진국고사) 5만동, 서호~호텔 5만동, 호텔~베트남항공 건물 4만동

 - 저녁: 하노이롤과 짜가라봉으로 $26

 - 공항택시: 베트남항공 건물~노이바이국제공항 25만동

 - 기타: 공항에서 커피 3봉지 구입($7*3), 생수 구입 등

 

3. 간략한 평:

 - 아침을 호텔에서 먹고 짐을 맡긴 후 시내구경(호안끼엠 호수~역사박물관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이동)

 - 도중에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들을 여럿 만났고,

    혁명/역사박물관은 점심시간(12:00~13:30)에 휴장

 - 역사박물관 문 안쪽에 있는 식당이 괜찮았음(무료 와이파이 가능, 식대도 비싸지 않은 편)

    역사박물관은 야외에 각종 석물을 전시하고 있어 휴장시간에 구경하기에 좋음

 - 호텔에서 출발할 때는 직원에게 부탁해서 택시를 불렀고, 문묘앞과 진국고사앞에서는 직접 택시를 잡아 탔음

 - 문묘는 진사급제비를 만지지 못하도록 하고, 종루와 북루 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점 등이 2006년에 비해 조금 달라진 것 같음

 - 호치민기념관 일대와 깃발탑(구 왕성터) 쪽은 관람을 포기

 - 공항으로 가는 미니버스가 출발하는 베트남항공 건물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으나, 막상 미니버스는 오후 7시가 막차라고 하여 이용을 하지 못했음(택시로 공항까지 이동)

 - 레프엉하를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었음(3년 반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 숙녀로 변신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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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가 짐속에서 약을 찾아 집사람에게 먹게 하고 잠시 쉬다가, 문묘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달라고 했다. 호텔직원에게 물어보니 6만동쯤 나올 거라고 한다(하노이 시내도 일방통행로가 있어 택시를 타면 지도상 거리보다 훨씬 멀리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시내에서 움직일 때는 지도를 손에 들고 다니며, 택시를 잡아주는 사람에게 대충의 비용을 물어보고 타는 것이 좋다). 간혹 가짜 택시를 타고 가다가 바가지 쓴 이야기도 들리는데, 이렇게 호텔직원이 잡아주는 택시는 요금면에서 시비가 없어 좋다.

 

15:15 문묘-국자감(文廟-國子監, Văn Miếu - Quốc Tử Giám, 한글로 쓰면 반뮤-꾸억뜨쟘; 공자와 그 제자 및 베트남에 유학을 장려한 왕들을 기리는 사당이 있으며, 베트남 최초의 대학인 국자감 위치했던 곳)앞에 도착했다. 베트남식 이름 Văn Miếu 뒤에 붙은 것은 국자감의 발음이자 입구가 있는 거리 이름이다(2006년에 혼자 찾아 갔을 때 정전쪽에서(그러니까 문묘의 가장 깊은 곳) 입구를 찾다가 허탈해 한 적이 있었다. 문묘는 상당히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발품을 제법 팔아야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

 

구글어쓰로 본 문묘와 모형도(정전이라 쓴 곳이 국자감 자리) 

 

 

돌아와서 정리하다 보니 이 근처에 하마비가 있다 하는데, 난 찾아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지금 베트남 젊은이들은 한자를 전혀 읽지 못한다. 왜?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 그렇지(1950년대초 호치민이 이끄는 독립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에 한자를 포함한 각종 외국어 교육을 금지했다 들었다. 이 방침이 언제 풀렸는지 몰라도 2006년 가을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베트남중앙은행 직원중에서도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직원이 몇명 없었다). 지금은 하노이외국어대학 동양학부내에 일본어과와 한국어과가 있을 정도이니 베트남(월남)도 변하긴 많이 변한 셈이다.

 

 

 

하마비(퍼온 사진)

 

2006년에 비해 매표소와 화단 등이 훨씬 더 정돈된 분위기다. 현재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일성홍기(一星紅旗)'가 아니라 1,000년전 레왕조의 깃발이 여기저기 달려있다(일성홍기는 진사제명비가 있는 구역내 연못에 하나 있다).

 

 

2층에 종이 달린 '문묘문(文廟門)'을 지나(들어갈 때 보면 닫혀 있는 작은 문중 왼쪽에 우문(右門)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마도 정전에서 봤을 때 방향 기준인 것 같다), 좌우로 잘 가꿔진 정원을 보며 안쪽으로 들어간다. 

 

 

안쪽에서 찍은 사진(밖에서는 닫혀있는 공간인데, 안쪽에서 보면 좌우에 작은 문이 하나씩 달려있다. 아마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것 같다). 안쪽에도 '문묘문'이라고 쓴 글자가 보인다.

 

이 문묘문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흥미로은 사진 두 장을 얻게 되었다.

이 사진 모두 2층에 종이 달려있지 않은데, 먼저 사진에서는 '문묘문' 글자바탕이 붉은 색으로 나타나 있고(2006년 9월에 방문했을 때와 동일), 아주 오래된 듯한 아래 사진에서는 문루 맨 위의 장식중 가운데 동그란 부분이 뭔가로 막혀 있다(글자부문도 검게 나타난 것으로 보아 채색이 되어 있던 게 아닌가 싶다)

 

 

다시 정원길을 지나간다.

 

이 작은 문을 지나면 다시 정원이 이어진다. 왼쪽에는 달재(達才), 오른쪽에는 성덕(成德)이라는 이름의 문이 별도로 있다. 현판을 찾지는 못했으나, 위키백과사전을 보니 아마도 이 문의 이름은 대중문(大中門)인가 보다.

The first courtyard extends from the Great Portico to the Great Middle gate ("Dai Trung"), which is flanked by two smaller gates: the "Attained Talent" gate ("Dai Tai"-달재) and the "Accomplished Virtue" gate ( "Thanh Duc"-성덕).

 

 

나갈 때 찍은 '달재'문

 

 

 

규문각(奎文閣) 현판이 달려있는 문. 1805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여기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가운데 연못이 있고, 좌우로 진사제명비가 보인다.

 

 

내 사진이 충분하게 선명치 않아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 

 

 

 

거북등 위에 세워진 진사제명비들은 연못의 좌우로 각각 2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진사제명비각 가운데에는 작은 건물이 따로 서 있으며 그 안에 조금 더 큰 규모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위키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Lê Thánh Tông의 명에 따라 1484년에 세운 116개의 비석중 82개만 남아있다. 그런데 1442~1779년중 총 82회의 과거시험이 치뤄졌으며(이중 81회는 Le dynasty 시절에, 그리고 1회는 Mac dynasty 시절에 시행) 총 82개의 비석에는 그 기간중 합격한 1,307명의 이름과 출생지가 기록되어 있다. 

 

In 1484, the King Lê Thánh Tông erected 116 steles of carved blue stone turtles with elaborate motifs to honour talent and encourage study. The turtle ("quy") is one of the nation's four holy creatures. The others are the dragon ("long"), the unicorn ("ly") and the phoenix ("phuong"). The turtle is a symbol of longevity. The shape and size of the turtle changed with the passage of time.

The doctors' steles are a valuable historical resource for the study of culture, education and sculpture in Vietnam. 82 stelae remain. They depict the names and birth places of 1307 graduates of 82 triennial royal exams. Between 1442 and 1779, eighty-one exams were held by the Le dynasty and one was held by the Mac dynasty. The ancient Chinese engravings on each stele praise the merits of the monarch and cite the reason for holding royal exams. They also record the mandarins who were tasked with organising the exams.

 

 

2006년에는 많은 거북이의 머리가 공부 잘하기를 비는 학생들의 손때가 묻어 까맣게 보였었다. 최근에는 문화재 보호차원에서 만지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 여전히 검은 머리를 한 거북이가 보인다(작은 거북보다 큰 거북이의 머리가 더 영험하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지 큰 거북이의 머리만 새카맣다). 

 

 

들어가는 방향 오른쪽 가운데에 있는 제명비정(題名碑亭).

 

 

 

 

아래 3장의 사진은 나올 때 찍은 반대편쪽(매표소 기준으로 보면 왼쪽) 모습이다. 가운데 전각에 현판이 달려 있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건 전경사진이다(퍼온 것). 들어가지 말라고 쳐놓은 금줄이 보인다.  

 

 

자유롭게 거북머리를 만지던 시절의 사진 몇장(퍼온 것들이다).

 

 

금줄로도 우리들의 공부 잘하려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지...

 

다시 문(이름이 大聖門인가 보다. 현판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나를 지나면 광장이 나오고, 정면에 대성전이 보인다.

 

 

 

광장 왼쪽은 기념품을 파는 곳이고, 오른쪽은 사무실이다.

 

 

대성전(大聖殿) 앞 건물<건물 두개가 연이어 있어서 앞 건물에는 현판이 달려있고, 뒷 건물에는 공자상이 있다>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썼다는(康熙御書) '만세사표(萬世師表)' 현판이 붙어있다.

누가 만세사표일고? 바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몇년전 사진에서는 고풍스런 분위기가 느껴졌었는데, 지금 이 현판은 완전히 새 단장을 한 것이다.

 

 

그 외의 현판들로 새롭게 단장을 했다.

 

 

 

 

대체 뭐하는 물건?

 

거북 등위의 이 새는 봉황? 학? 공작?

 

만세사표 현판 위, 천장의 모습(현판을 새로 단장하면서 미쳐 여기까지는 손이 가지 않았나 보다)  

 

 

 

바로 뒤편에 이어져 있는 건물 안에는 만세사표가 될만한 인물들의 흉상이 모셔져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중 4명(曾子 顔子 두명은 직접 가르친 사람들이고 子思는 증자의 제자이자 공자의 손자이며, 맹자는 훨씬 후대의 유학자다). 맹자가 여기에 분향된 것은 후대에 유학을 일컬어 '孔孟사상'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했을 게다. 블로그를 정리하다 갑자기 유가의 도통을 공부한다.

 

<공자의 제자에 대해서 위키백과에서 인용한 것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A%B3%B5%EC%9E%90%EC%9D%98_%EC%A0%9C%EC%9E%90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사후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공자 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켜 씨족제(氏族制)하에서의 도덕규범으로서의 를 중시하였다.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이다.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 ~ 기원전 491년?[1])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연(子淵)이다. 자를 따서 안연이라고도 부른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그러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빈곤하고 불우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자사는 "(天)"이라는 종교적 관념을 바탕으로 인간존재도덕을 규제하였다. 그것을 "(誠)"이라고 이름 지어 철학의 중심에 두고 만물의 근본인 "(道)"와 일치한다고 했다.

 

자사의 학통을 계승한 사상가가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이다. 맹자(仁) · (義)라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 기초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이 주장한 성선설(性善說)이었다. 맹자성선설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본성하다는 견해는 자사종교적 관념으로서의 (天)과 밀접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었다. 한편, 맹자의 정치론의 목적은 당시 붕괴되어 가던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다.

후에 송나라(960~1279) 시대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원전 221년 이전) 유가(儒家)의 도통(道通: 유학 전도의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의 계보가 중시되어 공자의 《논어(論語)》, 증자의 《대학(大學)》, 자사의 《중용(中庸)》, 맹자의 《맹자(孟子)》의 4서가 성립되었다.

 

 

 

가운데 공자상

 

왼쪽에 두분(맹자<왼쪽>와 증자<안쪽>)

 

 

진짜 금 거북이?

 

 

오른쪽에도 두분<안회<안쪽>와 자사<오른쪽>)

 

 

나보다 훨씬 선명하게 찍은 사진(퍼온 것)

 

집사람은 여기까지 보고 나서 힘이 들어 잠깐 쉰다고 했고, 나는 대성전을 왼쪽으로 돌아 뒤쪽으로 더 들어갔다.

 

 

여기는 문 좌우에 신상이 둘 있다.

 

문묘의 정전(다른 분들의 설명으로는 여기가 국자감이라 불리는 건물이라 했는데 자신 없다)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은 단층(현재 전통음악 공연장으로 사용중)이고, 뒤에 보이는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 좌우로는 각각 북루(오른쪽)와 종루가 별도로 세워져 있다.

여기도 중앙광장 좌우로 건물이 하나씩 더 있는데, 용도는 모르겠다.

 

 

 

 

 

 

거길 들어갔다 나오는 거 맞지? 이 종의 모습이 다소 낯설게 보여 옛날 사진을 찾다가 새 종을 달았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게 2006년 9월에 갔을 때 봤던 모습이다. 지금 종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달려 있었다. 저 종을 조금 내려 단 것인지, 완전히 새 종으로 교체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2006년 9월 방문시 종루 내부 

  

 

민속음악 공연장으로 쓰이는 앞 건물인데, 내가 갔을 때는 휴식시간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악기 하나하나를 자세히 찍을 수 있었다,

 

 

 

 

 

 

 

요건 퍼온 사진이다.

 

'어진 인재는 국가의 원기가 된다'라는 뜻이겠지.

 

이 대형 향로 뒤가 문묘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곳이다.

 

1층에는 좌우에 북과 종이 있고, 가운데 전경정학(傳經正學) 현판 아래 베트남의 대유학자인 쭈반안(Chu Van An; 주문안<周文安>)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얼추 번역해 보자면,

신하는 충을 다할 것이요

자식은 효에 매진하여야 한다.

부모는 자기자신을 잘 닦아 자식을 교화시켜야 하고 가장으로서 예를 지켜 가르침을 세워야 하며

자식은 부형을 존경하고

형제간에는 화목할 것이며

부부간에는 서로 존경하는 가운데, 아내는 남편과 자식이 ~가 없게 하며

가르치는 선생과 학생은 도로써 서로 대접하고

친구는 굳게 믿고 어질음으로 보답할지나 .....

 

 

요거이 과거합격자가 고향 갈 때 앞세우던 것? 

 

 

아마도 급제자가 입었겠지.

 

 

 

 

문묘의 역사.

1070년 이성종 Ly Thanh Tong에 의해 처음 지어지고('修文廟'라고 했으니 고쳐 지었다는 뜻?),

1076년 이인종 Ly Nhan Tong의 명으로 국자감에 문직관원의 아들들을 입교시켰다.

 

 

 

 

학생들이 입었던 옷

 

 

오른쪽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2층에는 베트남에 유학을 장려한 3명의 왕(황제라고 할까?)이 모셔져 있다. 옆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보니 그들의 업적은 대충 아래와 같다.

 

순서는 모르겠지만, 제일 먼저 Ly Thanh Tong(1023~1072, 재위는 1054년부터), 다음으로  그의 아들인 Ly Nahn Tong(1066~1128, 재위는 1072년부터) 그리고 한참 뒤의 인물인 Le Thanh Tong(1442~1497, 재위는 1460)이 그들이다. 여기서 Tong는 한자말로 임금을 나타내는 마루 종(宗)자를 의미한다.

 

Ly Thanh Tong(성종)은 1070년에 문묘를 짓도록 했고, 그의 장자로서 일곱살에 왕위에 오른 Ly Nahn Tong(인종)은 1075년 처음으로 과거제를 시행했으며 1076년에 국자감을 설치했다. Le Thanh Tong 재위시 대월국(大越國 Dai Viet)은 독립국의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더욱 융성하였고, 왕은 문묘를 개축하고 국자감을 확충하는 한편 과거시험을 매3년마다 치루도록 하고 급제자들의 이름을 진사제명비에 새기도록 했다.  

 

 

 

 

 

 

2층 난간에서 밖을 바라본다.

 

 

1층으로 내려와

 

 

 

후손들이 끊임없이 뺨을 어루만져주니 좋을까나?

 

 

대성전 앞마당에서 쉬고 있던 집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택시를 잡아타고 호떠이(湖西)안에 있는 진국고사(鎭國古寺; Chua Tran Quoc)로 간다.

문묘 관람시간은 15:15~16:06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