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야 친구들을 만나려면 주말을 기약하는 수 밖에 없었지만, 직장에서 은퇴를 하고 보니 주중에도 여기저기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난다.
그래서 매월 첫번째 월요일에 서울(근교 포함)을 산책하기로 했는데, 7월 모임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두번째 월요일에 마나게 되었다. 다만 비 예보가 있어서 실내산책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행선지를 변경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각종 전시 계획은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면 된다.
http://www.museum.go.kr/site/main/home
호수(호수 이름은 '거울못') 왼쪽에는 거울못 한식당이 있다. 외국 손님들을 공적인 경비로 초대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대는 조금 부담되는 수준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정자는 '청자정'이다. 7월 하순 쯤에는 거울못 주변에 (목)백일홍(일반적으로 배롱나무라고 부름)이 활짝 피리라.
룸: 상견례, 비즈니스 55,000원~70,000원 / 가족연 50,000원~7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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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 안쪽에는 다음 달에 전시를 시작(8월 4일부터)하는 '황금문명 엘도라도' 선전물이 자리하고 있다.
열린마당 오른쪽 상설전시실 입구에는 몽골의 게르를 한채 옮겨다 놓았다. 내가 관람할 전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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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의 제국 몽골
국립중앙박물관은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 고고학 연구소, 몽골국립박물관, 복드 한 궁전박물관과 공동으로 특별전‘칸의 제국 몽골’을 개최합니다. 한몽 공동 학술조사 2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한 이번 전시에는 몽골 국가지정문화재 16건을 포함한 536점의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귀중한 유산을 선보입니다. 유목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전시기간: 2018. 5. 16.(수) ~ 2018. 7. 17.(화)
전시장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전시품: 빌게 카간 제사유적 출토 금관 등 536점
전시구성
프롤로그. 몽골의 환경과 역사
몽골 사람들은 대체로 동서로는 다싱안링大興安嶺산맥에서 알타이산맥, 남북으로는 바이칼 호수에서 만리장성 사이의 땅을 주된 근거지로 살아왔다. 이 영역의 북쪽은 자작나무 숲이 빼곡한 시베리아로 이어지고, 남쪽은 점점 건조해져 삭막한 고비 사막에 다다른다. 그 중간에 대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몽골 사람들은 이를 무대로 유목 생활을 꾸려 왔다. 이들 북방 유목민들은 번영과 쇠퇴가 반복되는 역사의 긴 여정 속에서 대제국을 건설해 동서 문화의 교류와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등 세계사에 깊고 굵은 발자취를 남겼다.
제1부. 제국의 여명
몽골에서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80만 년 전이었다. 몽골의 석기시대는 대형 석기를 주로 사용하던 구석기시대, 잘 가공된 세석기를 만들었던 중석기시대, 정형화된 석기를 사용하면서 토기를 제작하고 천이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꾸미개로 몸을 치장하던 신석기시대로 구분된다.
청동기는 기원전 3,000년기 후반에 처음 나타났으며, 기원전 1,000년기 초반부터 널리 쓰였다. 이 시기에 사용하던 청동기에서 보이는 특징은 여러 동물 형상을 표현한 점이다. 히르기수르와 판석묘 등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청동기뿐 아니라 사슴돌과 바위그림에 다양한 동물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제2부. 고대 유목 제국
몽골 지역에서는 기원전 3세기 무렵에 흉노匈奴가 최초로 국가를 세웠으며, 이어 유목 민족인 선비鮮卑와 유연柔然이 활동하였다. 6세기 중반부터 9세기 말까지는 돌궐, 위구르, 키르기즈가 세운 국가들이 몽골 지역을 지배했고, 10세기 초부터 거란이 등장하였다. 이처럼 여러 유목 국가 가운데 흉노 제국(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과 돌궐 제국(552~745)의 유적이 최근에 활발하게 조사되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흉노는 중국 진秦나라(BC 221~BC 207) 및 한漢나라(BC 202~AD 220)와 맞설 만큼 강력했기에 동서 문명을 이어 주며 다양한 유적을 남겼다. 돌궐은 아시아 내륙의 초원과 오아시스 대부분을 하나로 통합한 거대 유목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이 만든 제사 유적에는 고대 돌궐 문자로 쓴 기록을 포함하여 돌궐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산이 남아 있다.
제3부. 칭기스 칸의 몽골 제국과 그의 후예들
몽골은 13~14세기 태평양 연안에서 동유럽, 시베리아에서 남아시아에 이르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초거대 제국을 건설하였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많은 국가와 종족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horum과 타반 톨고이Tavan tolgoi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의 생활상을 잘 보여 준다.
14세기 중반을 전후해 붕괴된 몽골 제국은 초원으로 후퇴했으며, 17세기에 만주인들이 세운 청 제국에 복속되었다가 1911년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티베트 불교는 16세기부터 널리 퍼졌는데, 정주定住 생활과 불교 사원 주변의 도시화 등 앞 시기와 다른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그 모습은 대승 운두르 게겡 자나바자르Undur Gegeen Zanabazar(1635∼1723)가 세운 사원과 여러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에필로그. 우리 역사와 유목 국가
광활한 초원에서 이동하며 생활하는 유목민에게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었다. 북방 유목민들은 동서남북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변화와 흐름을 서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며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하였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유목 국가인 흉노, 돌궐 등과 변경을 마주하며 경쟁을 펼쳤고, 고려는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큰 시련을 겪었지만 몽골 제국의 등장으로 본격화된 동서 간의 교류를 배경으로 국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시대에도 몽골어 학습서를 발간하여 역관을 양성하는 등 몽골 세력과의 소통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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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게르 안에는 아무도 없다. 얼른 안에 들어가서 이것저것을 살핀다.
몽골 국기도 손으로 그리기에는 벅차 보인다.
뭣에 쓰는 물건인고?
열심히 달리고 난 뒤에 말을 마사지해주는 도구라고 한다.
여기마저 월요일에 문을 닫는다면, 월요일에는 가 볼 데가 별로 없다(종묘는 화요일이 문들 닫는다).
'2018 괘불전-세 부처의 모임'을 보러 간 우리는 2층에 있는 서화관에 먼저 둘러보았다. 외국인 관람객을 위한 설명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번 지방자치단체 선거 출마자들중 아주 건방지게도 '출사표를 던지고'란 표현을 쓴 인간들이 보여서 너무나 실망했던 적이 있다.
대체 출사표란 무엇인가? 신하가 임금(당시 주권은 임금에게 있으니 당연)에게 '내가 이러저러한 사유로 군대를 끌고 무엇을 하려오' 하고 공손히 바치는 글이 바로 출사표다. 그런데 출사표를 던져? 어디로? 이 것들이 국민 알기를 장기판의 졸보다도 못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한 이런 표현은 우리 사회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게다.
'2018 괘불전-세 부처의 모임' 전시 안내다. 이번 전시는 상주 용흥사 괘불이다.
우리는 불교회화 전시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여기서부터는 역사공부를 하는 셈 치고 열심히 들여다 봤다. 정말 아쉬운 것은 이러한 불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고려조의 뛰어난 작품 대부분이 현재 일본인 소유로 국내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불화앞에 한참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단체사진을 한장 찍었는데, 엄청나게 큰 불화이기 때문에 배경사진으로는 제대로 찍히지 않았다.
점심 때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밖으로 나가 편의점의 '백종원표 도시락'으로 요기를 했다. 참고로 편의점 옆에 있는 '작은 식당'은 샌드위치 등이 주 메뉴여서 우리 나이에 맞는 게 없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 우산커버를 씌우고 입장했다.
위에 실은 몇장의 사진은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몽골의 초원에서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80만년쯤 되었다고. 사실 나는 몽골의 역사중 북방 기마민족의 중국침입(심지어는 한왕조를 개척한 한고조 유방마저 흉노족과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매해 조공을 바치는 조약을 맺었다 - 후세에 한무제가 드디어 흉노를 물리치고 자주 한족의 나라 체면을 지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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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의 기록이다. 기원전 318년, 흉노는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齊)의 다섯 나라와 함께 진(秦)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5국의 참패로 끝났다. 이후 조의 효성왕(孝成王, 재위 기원전 265년 - 기원전 245년)의 시대에 장군(將軍) 이목(李牧)이 안문(雁門)에서 흉노를 막아 싸워서 흉노 선우(單于)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기원전 200년에 흉노는 마읍성(馬邑城)을 쳐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왕 신(漢王 信)의 항복을 받아내고 태원(太原)으로 진격, 진양(晋陽)으로 나아갔다. 그곳에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유방이 친히 이끌고 온 한군이 도착했으나, 큰 눈과 추위로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많은 병사가 추위로 곤욕을 치렀다. 묵돌은 한군을 북쪽으로 유인하고자 거짓으로 물러났고, 백등산(白登山)에서 7일간 포위된 유방은 진평(陳平)의 계략에 따라 묵돌의 알지(閼氏, 역대 선우의 어머니)를 움직여 공격이 잠시 느슨해진 사이에 가까스로 달아났다.
이후,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전한과 흉노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주변 오랑케국과 항상 군신관계를 맺어오던 한나라에게 양국 간에 동등한 지위를 의미하는 형제관계란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뜻한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으로서 이 얼마나 굴욕적인 화친인가.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국의 조정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한나라가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기원전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에 전한이 사실상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 측의 기록에는 한 결 같이 흉노를 야만인이라고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것이다.
묵둘이 죽은 뒤 선우가 된 노상(老上, 재위: 기원전 174년 - 기원전 161년)에게 한 문제는 화친 조약에 따라 공주를 출가시켰는데, 이때 공주를 수행하는 임무를 맡게 된 환관 중항열(中行說)은 흉노의 땅에 가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고사했지만 강제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는 흉노에 붙어 노상 선우의 상담역으로서 선우가 한을 침공하도록 부추겨 한의 골칫거리가 된다.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전한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년 - 기원전 87년)는 흉노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 흉노를 공격하고 서역을 정벌하였다. 한군이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 흉노의 전쟁으로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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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의 역사와 비슷하게 석기시대-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접어든다.
그렇지만 유목민족의 특징이 나타난다.
초원지대에 살던 기마민족으로만 생각하던 내게, 이렇게 섬세한 금속공예제품은 충격이었다.
돌궐은 문자까지 갖고 있었다고
드디어 우리나라(특히 고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몽골에 대해서
내가 중국과 서역을 잇는 대동맥 카라코람(카로코룸) 하이웨이란 말은 여러차례 들어봤어도 그 위치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었다.
국호를 원으로 고치고 나서 천도한 곳이 바로 당시 연경으로 불리던(나중에 대도) 현재의 북경이다. 그들은 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을까?
차를 만드는 도구
여기서부터는 역사속 한국과 몽골을 다루고 있다. 우리 농악대에서 흔히 사용되는 '호적-오랑캐의 피리'은 몽골에서 온 것인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남산이 비구름에 가려 희미하게 보인다.
우리는 삼선교 성북천 가에 있는 막걸리집을 찾아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자리가 적절치 않아 망설였던 이야기 등을 나눴다. 이 집에서는 경향 각지의 막걸리를 팔고 있었는데, 강원대 교수를 하는 친구가 찾던 해창막걸리는 없었다.
각자 좋아하는 막걸리를 주문하기 해서, 세종류의 막걸리를 합해서 여섯병이나 마셨다.
문제는 1차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바로 성북동 막걸리집이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해창막걸리가 있다고 해서 다시 들어갔다. 창밖의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빈 막걸리 병은 다시 늘어만 가고.
성북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두 집
7월의 두번째 월요일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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