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2018년 6월 파주의 율곡 이이선생의 흔적을 찾아서

무애행 2018. 7. 19. 20:05

일전에 파주의 검단사와 오두산전망대 그리고 반구정까지 둘러봤는데, 이번에는 율곡 이이선생의 발자취를 쫓아가 보기로 했다(새벽부터 움직였으면, 황희정승의 묘소와 임진각도 둘러봤을텐데, 좀 아쉽기는 하다). 


길 찾기용 지도상으로는 파주이이유적 혹은 율곡기념관을 입력해야 제대로 갈 수 있다. 난 첨에 율곡묘소를 찾았더니, 길이 보이질 않아 당황했었고 자운서원도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모두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2018년 7월 현재 네이버지도는 율곡기념관을 입력하면 바로 근처에 있는 율곡연수원을 나타낸다. 율곡묘소 표시도 없고 단지 신사임당 묘소만 보여준다. 이 점에서는 다음의 지도가 더 정확하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간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_문화가 있는 날이어서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파주이이유적'이란 표시의 유래를 찾아보니 "1973년 자운서원, 율곡이이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이이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사적 제525호 “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었다."라는 설명이 있다.


자운서원앞 너른 뜰에 1974년 5월에 세워진 율곡선생 신사임당 유적 정화기(노산 이은상 지음)가 있다.








매표소 왼쪽으로 들어가니 조금 높은 곳에 율곡이이 신도비(栗谷 李珥 神道碑)가 보인다. 이 신도비는 율곡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고 한다.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어 비석을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었다. 다만 비석에는 총탄에 맞아 파손된 부분이 여럿 보인다. 아마도 북괴가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노리고 일으킨 6.25 전쟁의 와중에서 입은 피해이리라.


그런데 비각을 세우면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초석 주변을 시멘트로 발라놓은 것처럼 보였다.








건너편에는 율곡기념관이 있고, 그 아래 평평한 곳에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일전에 한강학습선을 탔을 때, 해설사가 '밤꽃의 암술을 보신 적이 있나요?' 하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사진을 찍긴 했으나 여전히 암술을 제대로 구분해서 볼 수가 없다.




조금 더 들어가니 왼쪽에 자운서원(紫雲書院)이 보인다.



6월 30일(토)에 신사임당 제467주기 추모제를 거행한다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외삼문인 자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좌우로는 서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는 당우가 동(입지재).서(수양재)로 하나씩 서 있는데, 오른쪽 당우 한켠에는 '신사임당영당'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강인당(講仁堂)을 배경으로 아주 커다란 느티나무가 나오게끔 포즈를 취해봤다. 느티나무에는 시멘트로 수선(?)한 흔적이 보인다.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자운서원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다. 비문은 예서체로 되어 있는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으며, 비명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숙종 9년(1683)에 세워졌다.






강인당뒤 내삼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사당인 문성사(文成祠)가 나타난다.





위 설명대로라면, 왼쪽에는 현석 박세체가 오른쪽에는 사계 김장생이 모셔졌을텐데 무슨 이유에선지 사계의 영정은 보이지 않는다.





문성사(文成祠) 좌우에 있는 손 닦는 곳(관세위)과, 축문을 태우는 곳(망료위) 





약수터 인근으로는 등산로가 조성되어 있다.



자운산 자락에 자리를 잡은 율곡 집안의 묘역으로 들어가려면 여견문(如見門) 통과해야 한다. 




계단을 오르면 율곡의 맏아들 ->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 율곡의 큰 형님 -> 율곡과 부인 곡산노씨의 묘소가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좌우로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율곡의 둘째 부인과 누이, 후손에 이르는 묘소가 모여 있다.





묘비에는 ‘문성공 율곡 이선생지묘 정경부인 곡산 노씨지묘 재후’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다. 묘비에서 알 수 있듯이 첫번째 부인 곡산노씨는  남편과 합장이 아니라 남편의 묘 뒤에 따로 묻혔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비문중에는 우암 송선생(우암 송시열)이란 글자가 보이는데, 이로써 당시에도 대학자에 대해서는 '선생'이란 표현을 썼음을 알 수 있었다(다산 정약용선생 생가터와 묘소를 방문했을 때는 이 '선생'이란 표현이 낯설어서 혼났다).







결례를 무릅쓰고 율곡 묘소를 배경으로 셀카 한장!




율곡 묘소에서 내려다 본 모습. 바로 아래가 울곡의 큰 형님, 그 아래가 율곡의 부모(이원수와 신사임당) 그리고 맨 아래는 율곡의 아들 묘소이다. 특이하게도 율곡의 부모 묘앞에 조성된 석상은 키가 작은 편이다.





율곡기념관으로 들어간다.







여기는 기념사진 찍는 곳


















여기에서 처음으로 율곡선생에게 세명의 부인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 부인 정실 곡산노씨(황해도 출신)로부터는 자식을 얻지 못했으나, 전주김씨로부터 얻은 자식이 대를 이은 것으로 표에 나타나 있다. 용인이씨로부터도 소생이 있었는데, 도표상으로는 두번째 부인이 용인이씨처럼 보였으나, 묘역에서는 전주김씨를 두번째 부인으로 적어 놓아서 그 앞뒤를 가릴 수 없다.


다만 아래 사이트에서는 전주김씨 소생 이경림 李景臨을 39세에 얻고, 용인이씨로부터는 44세에 이경정 李景鼎을 얻었는데, 둘다 庶子라고 적어 놓았다. 더우기 자식이 없었던 정실 부인 곡산노씨는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부터 남편 신주를 지키려다 수모를 당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봐서, 전주김씨와 용인이씨는 모두 곡산노씨 생전에 얻은 첩실(측側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대를 잇게 한 전주김씨는 가족묘역에 묻혔고, 두번째 부인이란 표현도 있는데 용인이씨의 무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게 좀 이상하긴 하다. 또 전주김씨 소생으로 첫째 아들인 이경림은 평창군수를 지냈고(혹시 사후에 받은 관직?) 할아버지 바로 아래 묻혔는데, 둘째 아들인 이경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http://cafe.daum.net/jangdalsoo/iWei/1?q=%EC%9C%A8%EA%B3%A1%EC%9D%98%20%EA%B0%80%EA%B3%84%EB%8F%84

http://tip.daum.net/question/3020219?q=%EC%9C%A8%EA%B3%A1%EC%9D%98+%EC%95%84%EB%93%A4







내 눈에 확 들어온 '화석정 8세부'

화석정에 가 봅시다.




점심 때가 되었으므로 여기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내부에는 남녀성기 모양으로 깎은 나무 조각이 즐비하다.





화석정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는 길은 마지막 갈림길에서 조심해서 언덕위로 올라가야 한다. 도중에 내가 군 생활을 시작했던 1사단 훈련소(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1980년 5월초에 101보충대로 입대하여 이 곳으로 배속)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슴이 뭉클하다.

 




야사에 등장하는 선조의 피난길 이야기에 '화석정에 불을 질러 어두운 밤길을 밝혔다'가 나오는 데 어디까지가 진실일런지? 





임진강 상류쪽을 바라보니 다리가 하나 보인다. 혹시 '리비교'?


나중에 찾아보니 '전진교'라고 하네. 내가 이 근처에서 군대생활을 하던 시절 건넜던 리비교(전진교보다 더 상류쪽에 있다)는 2016년 10월에 안전상의 이유로 통행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최근에 이르러서 안전도를 보강한 다음 관광자원으로 쓰기로 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http://leaders.asiae.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144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7/13/0200000000AKR20180713129700060.HTML?input=1179m


아래 사이트에서는 귀중한 옛날 사진을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leemin215/13385921






아까 율곡기념관에서 본 화석정시_8세부시


누가 이 시의 작자인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고 들었는데(내 블로그 http://blog.daum.net/tigerahn1/744참조), 여하튼간에 난 두번째 구절의 번역(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나더러 번역을 하라 했다면, '숲속 정자에 가을이 깊었는데 지나가는 나그네의 맘은 가늠하기 어려워라'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구절 때문에 율곡이 8세에 지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무리 율곡이 신동이었고 또 어려서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깊었더라도, 여덟살짜리의 감정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내용으로 생각된다.




화석정에 대해서는 1) 박정희대통령의 친필 편액이 맘에 걸린다. 2) 누각과 임진강 사이에 고속도로를 놓은 작자가 누구냐? 3) 6.25 동란 때 전소된 것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왜 옛날 정자 사진(일제 때 촬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양새를 다르게 지었느냐? 하는 등등의 말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게 다 역사 아니던가?



율곡기념관과 화석정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다 보니, 황의정승 묘소는 또 빠졌다. 담에 간다면 임진각과 묶어서 가 봐야겠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찾아본 여러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