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잡기

갑오년 설날

무애행 2014. 3. 6. 10:32

지난 추석 때는 큰 형님께서 사위를 기다리며 고향에 있는 선영에 성묘를 가지 않는다고 하셔서, 나도 고향엘 가지 않고 곰배령으로 놀러갔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설날 차례를 모실 때에는 한 동네에 여러 친척들이 같이 사셨는데 사당차례(종가에서 지냄; 당시 종손이 재당숙)와 고조부모 등 차례->어른들께 세배하고 떡국 먹음->큰댁(큰 아버지가 사시는 곳)으로 옮겨서 증조부모와 조부모 차례를 모시고 점심 먹음->이후 동네 근처에 있는 조상묘소에 들러 새해 인사->옆 동네에 사시는 일가친척을 방문하여 세배(여러차례 설날 음식으로 간식을 먹음)->다시 내가 살던 동네로 돌아와 다른 일가친척들에게 세배를 하는 긴 일정을 갖고 있었다.     

 

  * 중시조는 고향에 있는 종가의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 및 명절차례 외에도 방학동에 있는 묘역에서 연중 2차례(청명, 추석 전날) 제사를 모신다. 집에서 직접 제사를 모시지 않는 다른 조상님들은 매년 음력 10월 중순에 경기도 광주-방학동-고지내 이렇게 시향을 모신다. 

 

세뱃돈이야 거의 받은 기억이 없지만, 어른들을 따라 다니며 '여기는 누구 산소이고 이 집에 사시는 분은 누구인데' 하는 설명도 들으며 작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뒷동산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하루 해를 보내곤 했다. 어른들께서 설날 이전에 성묘 다녀올 산길에 눈을 치우고 길을 내셔서 그나마 좀 편하게 성묘를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그 때는 가정형편상 고향을 떠나 외가동네로 이사를 왔던 터라 난 조상님 산소를 연결하는 산길의 눈을 치운 적이 없는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산소에 갈 기회가 적었다. 그나마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부모님 세대가 다 돌아가시니 이제 고향마을에는 종손인 8촌 형님과 어릴 적 담장을 같이 하고 살았던 아저씨 한분만이 남아 계시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전 양주군 덕정/덕계 일원에 대규모 주거단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조상님들을 모신 산을 관통하여 도로가 신설됨에 따라 여러 곳에 나뉘어 모셨던 증조부모 및 백부모 묘소를 조부모 및 부모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묘소관리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선산을 가로질러 도로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옛날처럼 걸어서는 성묘를 다닐 수 없게 되었지만, 도로 남쪽으로 폭은 좁지만 별도의 접근로를 만들어 이제는 조상님들을 모신 곳 바로 아래까지 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설날 아침, 대치동 큰 형님댁에서 차례를 모신 후 사위를 기다리는 큰 형님과 대전으로 내려가시는 작은 형님께 인사를 드리고 우리 식구(집사람과 아들 둘)만 고향으로 향했다. 먼저 산소에 들러 증조부부터 사촌 형님께 차례로 새해 세배를 드리고 종가로 갔다.

 

 

아이들에게 사당에 들어와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설명을 하고, 신주 덮개를 열어 중시조(연창위 할아버지와 정의공주 할머니)로부터 몇대손인지를 알게 한 후 배례를 드렸다. 우리 가문에서는 차례를 모신 이후 사당의 제상에는 왼쪽부터 포-간장-혜만 남겨둔다. 늦게 사당참배를 하는 후손들은 향을 사루고 배례하면 된다.

 

 

바로 옆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종가 건물이다. 어려서는 종손가족이 여기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동쪽으로 새 집을 지어 이사하고 이 건물은 보존하고 있다.  

 

  

사당참례를 마치고, 종가에 들어가 모처럼 설날 술상을 앞에 놓고 종가집 형제들(나와 8촌지간이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준 형제들, 그리고 손님 대접하느라 부엌에서 고생하신 형수님과 제수씨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외숙이 사시는 곳이자,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 옮겨와서 20여년간 사셨던 송산이다. 우리 집이 더 이상 고향에서 견뎌내기 어렵게 되자 외숙께서 '매형과 누나가 살고 봐야 한다'면서 이사를 권하셨고(내가 중학교 1학년때), 나는 그 곳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내가 결혼후 '명절때 이리저리 인사를 다녀야 된다'고 이야기 했을 때, 아내는 왜 명절 당일에 친정인사를 가지 않냐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저간의 사정을 다 듣고는 정말 고맙게도 긴 명절 인사일정에 더 이상 토를 달지 않는 좋은 아내로 남아있다.  

 

송산에서 외숙께 세배를 드리고 집에 돌아오니 저녁 여덟시쯤 되었다. 아이들하고 윷놀이 한판을 하고 잠을 청한다.

내가 술을 한잔 한 고지내를 떠날 때부터 운전은 큰 아들이 했다.

 

내일은 처가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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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말 금초를 하기 전의 부모님 묘소 모습이다. 내가 서너시간동안 겨우 부모님 산소 봉분과 그 주변에 있는 풀 몇포기를 뽑았을 뿐이다. 잘 자라라고 하는 잔디보다 다른 풀들이 항상 영역을 침범하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내 세대에는 이처럼 조상님 산소를 관리한다지만, 내 아들 세대에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5년전까지는 형제들이 모여 직접 예초기를 돌리면서 금초를 했으나 이후에는 힘이 달려 사람을 사서 금초를 했다. 올해는 봉분 1기당 6만원씩 주었는데 편하기로 말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산소앞 상수리 나무에 핀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