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무애

김제 벽골제에서 개태사 철확까지 - 3

무애행 2011. 10. 7. 16:34

마음 같아서는 근처에 있다는 쌍분을 더 가보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져 서둘러 길을 떠난다. 익산 왕궁리 유적지에서 견훤릉까지는 약 22Km인데, 4차선으로 확장되고 거의 자동차전용도로화된 국도 1호선을 이용하니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40분 정도). 사실 이 도로 이용 차량도 바로 옆을 나란히 달리는 호남고속도로 덕분에 그다지 많지 않다.  

 

견훤릉이라고 주장되는 것은 연무근처의 동네 뒷산 위에 꽤 큰 봉분으로 되어 있다. 지난 봄 강경에서 우여회를 먹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마을길을 돌아 능 근처까지 차로 이동했던 기억이 희미한데, 오늘은 마을 입구에 주차장 안내가 되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계단길을 약 200미터쯤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견훤릉이 나타난다.

 

위치: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3번지

봉분의 크기: 지름 10m, 높이 5m, 둘레 83m*

  * 난 이 둘레 길이가 봉분의 둘레가 아닌 묘역의 둘레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봉분의 아래 둘레는 2πr로 구해질 텐데 그러면 31.4m(2x3.14x5)밖에 더 되겠는가?  

 

 

때가 때인지라 잔디를 깎기는 깎았는데, 깎아낸 잔디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이런 것이 열심히 일하고도 남에게 욕먹는 좋은 사례다).

하나 배롱나무는 그 위세가 대단하다. 배롱나무 꽃은 거의 다 졌고, 껍질이 벗겨지고 있다.

 

 

 

'후백제견훤왕릉'이라고 새겨진 비석(위 사진)과, 최근에 마련한 것 같은 상석(아래)

 

 

안내판이다. 왼쪽에는 한글 안내문 아래 영어가 병기되어 있고, 오른쪽은 일본 관광객을 배려한 듯하다.

 

 

그런데, '甄氏문중'에서 비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서에 기록되기를 '甄萱'의 아버지는 '아자개'요, 아들은 '금강, 신검, 양검, 용검'의 이름을 가졌는데, 어찌 性을 '甄'으로 가졌을 것이냐? 모를 일이로다.

 

또 하나 작은 궁금증은 왜 비와 상석이 저 좁은 터에 세워졌을까? 하는 것인다.

 

마지막으로 이 지역을 관리하는 지자체에서는 주변의 수목을 정리하여 능원이 멀리서도 잘 보이게 함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견훤의 유언대로 이 곳에 묘를 썼으면 멀리 전주강역이 보이게끔 배려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계단을 올라갈 때는 덜하더니 내려올 때는 장딴지가 당겨 발걸음이 자유롭지 못하다. 은진미륵이 계시는 반야산 관촉사로 차를 몰고 가니 이정표는 건양대와 관촉사를 함께 지시하고 있었다. 건양대를 한바퀴 돌아 관촉사 입구에 도착하니 오른쪽의 연꽃밭이 나를 반긴다(견훤릉에서 관촉사까지 11Km, 약 20분 소요). 이미 연꽃은 다 졌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반야산 관촉사 일주문이다. 사천왕문 앞에서 문화재관람료를 내고 들어간다.

 

 

 

 

 

 

사천왕문을 지나서 계단을 하나 오르면 1953년 한국전쟁 휴전을 앞두고 이승만대통령이 포로석방을 명령함에 따라 자유대한의 품에 남을 수 있었던 분들이 감사의 뜻을 새긴 비석이 서 있다. 날이 흐려서인지 경내에 살짝 어둠이 깔리는 것 같다.

 

 

사실 은진미륵부처님은 그 크기외에는 조각기술의 미숙함 등으로 불교미술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개태사 삼존석불의 경우도 예술성은 신라 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 윤장대는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하는 것이다. 아마도 예전에 글을 읽을 수 없거나, 경전을 차근차근 다 읽을 수 없었던 중생에게 불교에 가까이 올 수 있게 하려는 배려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오른쪽엔 한글로 '관촉사', 왼쪽에는 한자로 '해탈문'이라 새겨져 있네요. 관촉사 경내에는 이처럼 돌에 한글로 새겨진 글자가 많이 보인다.

 

 

삼성각 아래 바위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전 문화재청장 유흥준씨의 기념식수도 있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인공적으로 열을 지어 세워놓은 듯한 저 아름다운 바위에 많은 글자(주로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조선후기 이후 힘깨나 썼던 양반네들이 이 곳에 쳐들어와(?) 자기네 족적을 남겨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탑과 석등과 미륵부처님 모습

 

 

 

 

 

 

날이 더 어두어지기 전에 개태사를 들러야 했기에, 다시 서둘러 길을 떠난다. 그런데 논산부터는 대전방향으로 차가 제법 많이 늘어났다. 더군다나 짐을 실은 채 1차선을 점거하고 달리는 화물차들이 간간히 섞여 있어 추월도 쉽지 않다. 17Km의 거리를 25분 걸려 개태사에 도착하니 멀리 북쪽으로 구름에 쌓여있는 계룡산 천황봉 모습이 보인다.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세운 절로 유명하다.

 

아직 사세가 작아서 그런지 일주문(사천왕문터인가?)에는 그 흔한 현판도 없다. 중창불사 계획은 아래 그림과 같고...

 

 

 

10여년전 방문했을 때는 이 요사채도 없었다.

 

 

아주 작은 사이즈의 화장실(요사채 뒷편에 있다)

 

 

5층 석탑과 미륵대보전(저 전각안에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다-내가 찍은 사진은 없고 논산시에서 제공한 사진을 대신 올린다). 내가 갔을 때 미륵대보전안에서 예불이 모셔지고 있었다. 웬만하면 나도 동참하고 싶었는데, 어제 너무 무리한 탓인지 큰 절하는 것도 어려워, 밖에서 합장 3배만 하고 돌아나온다.

 

 

 

 

미륵대본전 안에 모셔진 석불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래 자료로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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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지 석불입상은 중앙에 본존불,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한 삼존불입상이다. 본존불은 좌우 230㎝, 앞뒤 216㎝의 방대형 대좌에 서 있다. 대좌 네 면에는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 위에는 별석으로 본존불이 서 있고, 발등 위로 천의자락 끝이 돌대처럼 가로로 얹혀 있다. 소발(素髮)에 육계는 큼직하며 얼굴은 둥글게 표현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선각되어 있고 대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모습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렸고, 왼손은 복부 가까이에 대고 있다.

좌협시보살은 머리 부분이 결실된 것을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에 비해 조각이 화려하고 섬세하다. 오른손은 외장한 채 네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으며, 왼손은 가볍게 쥐고 있다. 양 팔뚝에는 연화문 띠가 돌려 있고 손목에도 팔찌가 조각되어 있다. 천의(天衣)는 우견편단의 모습이나 직선 및 호선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우협시보살은 소발에 높은 육계를 가지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머리에서 흘러내린 머리띠 장식은 어깨에 닿아 있다. 천의는 우견편단으로 S자형 및 호선으로 처리되어 발등까지 내려오고 있다. 팔뚝에는 넓은 연화문 띠가 조식되어 있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꽉 쥐고 있고, 왼손은 약지와 소지만 편 상태이다. 대좌 중앙에는 좌협시보살처럼 20×12㎝의 구멍이 패여 있다.
 

 


 

지난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설치했을까? 아님 금년 여름 세찬 비바람을 막기 위해 비닐을 덧붙였을까?

 

 

철확이 보인다. 저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 보물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민속자료 제1호란다.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빗방울이 서너개 듣는다. 철확을 요모조모 살피는 중에 여섯시가 넘어가니 배도 고프다.

 

토요일에는 계룡산 3사 방문을 위해 10시간 넘도록 고개를 세번 넘었고, 일요일 아침에는 김제에서 운동을 한 후 벽골제-익산 미륵사지-왕궁사지-견훤릉-관촉사-개태사를 들러 대전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다 소화하니(차량 이동거리는 220Km) 몸은 피곤해도 맘만은 풍족하다. 대전에 돌아와 반주한잔에 깊은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