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사에서 열린 음악회에 다녀온 이후 중국 섬서성 서안여행(화산포함)을 잠깐 다녀왔고, 그 다음부터는 부처님오신날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잘 마무리한 5월말에 시간이 나서, 다시 가 봤다.
경내 법화전에 19세기 말에 조성된 불화 3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해서 불문곡직 들어가서 3배를 하고, 천천히 둘러봤다. 주불 뒤편의 불화는 유리로 보호되고 있어 사진을 찍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법화전 앞 화단의 꽃
무량수전으로 올라갔다. 날씨가 화창하지 않아서 한강이 흐릿하게 보인다.
무량수전 내부 모습. 경건한 마음으로 아미타부처님께 3배를 올린다.
이 절의 최근 모습(2018년 1월말)과 설명은 아래 사이트 참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wjhlav&logNo=221193495554
명부전 오른쪽에 소나무길이라는 팻말이 있어 올라가 봤다. 이 날 이 길을 걸은 사람은 내가 처음인듯, 나무 사이로 쳐진 거미줄을 걷어내느라 천천히 걸었다.
소나무길을 벗어나니 군사작전도로처럼 보이는 넓은 길이 산 위로 뻗어있다. 그 옆에는 버찌가 익어가고 있고(몇개 따 먹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아주 날씬하고 키도 아담한 3층 석탑이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주변으로는 근처에서 주워온 돌로 석탑모양을 낸 것들이 여러개 보인다. 여기 석탑의 조성과 돌무더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2013년 봄에 이 곳을 방문한 아래 글에 부분적인 설명이 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ee1478&logNo=100186425011
서북쪽으로는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보인다. 저기도 들렀다 가야지.
내려오다 보니, 개미들이 집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행여 그들을 다치게 할까봐 조심해서 걸었다.
검단사에서 머지않은 곳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다. 다음이나 네이버에서는 민감한 지역의 위성사진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구글어쓰에서 이 지역 사진을 만들었다.
소형차는 지금 내가 사진을 찍은 곳에 주차를 하고, 버스를 타고 온 단체손님은 위쪽까지 올라간다.
통일기원북.
북 가까이 접근할 수 없게 막아놓았는데, 버스가 가깝게 주차되어 있어 정자를 포함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일단 주차장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통일동산 방향으로는 엄청나게 큰 건물이 있어 알아보니 '고려통일대전'이라고 하던데, 공사를 시작한지 한참이 지났어도 아직 개장을 못하고 있다고.
임진강과 자유로
대개의 통일관련 시설물은 무료입장이지만, 여기는 입장권을 사야 한다.
흥남철수때 피난민을 가득 태우고 부산으로 내려온 '매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ory)' 관련 전시물. 아마도 영화 '국제시장'을 본 사람들이라면 감회가 새로울 듯하다.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는 아이들
여기부터는 최근의 남북관계 개선 노력과 지나온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낸 조명균 통일부장관의 얼굴이 나온 장면을 주로 찍었다.
야외전망대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망원경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실내에서는 외국관광객을 대상으로 설명회가 열리고 있었다.
단체관광객이 계속 도착하고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떠나서 조선조 황희 정승의 얼이 깃들고 있는 반구정(伴鷗亭)으로 이동했다.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입장료를 받지 않다는 안내가 있어 그냥 들어갔다.
황희정승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바 있지만, 호가 방촌(厖村)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죄송합니다아~~
황희(黃喜, 1363년 3월 8일 (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28일 (음력 2월 8일) )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고려조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종묘 세종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아들과 사위가 물의를 빚어 그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신임한 세종대왕의 배려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여기부터가 진짜 황희정승의 노년과 관련된 곳이다.
난 정자가 반구정 하나인줄 알고 왔는데, 두개가 보인다.
아래 정자가 반구정(伴鷗亭)이고, 바로 윗쪽에 앙지대(仰止臺)가 있다.
앙지대(仰止臺)
정자에 잠시 올라가서 강바람을 쐬고 싶었으나, '정자에 앉거나 눕지 말라'는 경고가 있어서 그냥 내려왔다.
앙지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북쪽 우리 땅. 개성공단으로 전기를 보내기 위한 고압철주가 보인다.
앙지대에서 내려다 본 반구정.
앙지대와 반구정 바로 아래에 이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한 군사철책이 지나고 있다.
반구정에서 내려오니 황희정승 동상이 서 있다.
방촌(황희정승의 호) 기념관
조선시대 청백리.
제 아무리 고관대작을 여러해 지냈어도, 집안이 곤궁하면 식솔들은 어찌 살란 말이냐? 당시 정승의 녹봉(祿俸)으로도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말이더냐? 그게 사실이라면, 뇌물을 받아먹으라고 부추긴 꼴 밖에 되지 않았을까?
난 이런 면에서 공직자에게 지나친 근검절약을 요구하는 급여체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기념관에는 유독 세종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군부실세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와 관련된 일화가 많아 보인다.
내 외가가 고령신씨(보한재 신숙주 후손)인데, 그쪽 어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세조의 단종축출(계유정난이라 함)이 없었더라면, 조선조는 전주이씨 왕조에서 순천김씨 왕조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황희관련 유적으로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광한루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처음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시 파주를 방문하게 될 경우에는 황희묘역을 우선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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