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2015년 7월 국립중앙박물관의 폴란드특별전 관람(1)

무애행 2015. 9. 13. 08:42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폴란드 특별전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만에 4호선 이촌역에서 내려 박물관으로 걸어 들어간다. 박물관 경내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중에 데이트를 즐기는 듯한 젊은이들을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올라온다. 나도 한때는 저랬었지!

 

 

 

 

 

오늘은 곧바로 실내전시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야외에 있는 각종 석탑들을 먼저 보기로 하고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가다가 호수를 구경하러 정자 있는 곳으로 갔다.

 

 

 

 

 

 

 

백일홍 꽃들이 참 좋다. 갑자기 계룡산 신원사 경내의 커다란 백일홍 나무가 생각난다.

흰색 꽃을 피우는 나무도 있던데, 여긴 온통 분홍색 꽃이다. 

 

 

 

 

참새들이 한참 동안 정자 바닥을 돌아 다닌다.

 

 

 

 

 

 

 

 

어려서는 '왜 저게 7층이야?' 했었다. 기단부를 제외하고 층수를 세어야 하는데, 그 때는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저나 풍화된 석재를 받쳐놓은 듯한 모습에 가슴 한쪽이 저려온다. 화강암은 풍화작용앞에서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이 구역에서는 외국인들을 더 많이 만났다.

 

 

 

 

고달사 쌍사자 석등이다.

당시 석공이 사자 실물을 봤을리 만무한데, 어떻게 보면 조금 귀엽게 표현한 것 같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관의 변화인지 아님 석공의 돌 다루는 솜씨가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퇴화한 것인지 헷갈린다.

 

 

 

 

 

 

 

 

 

 

 

 

 

 

 

야외 전시구역을 지나니 미르폭포가 나타난다.

 

 

  

천천히 용산가족공원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한여름, 습한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지 않다.

 

 

 

 

 

 

 

 

--------------------------------------------------------------------------  

원각사[圓覺寺](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고려 때부터 흥복사()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왔던 사찰로, 조선 태조 때 조계종()의 본사가 되었으며, 세종이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합한 뒤 기존 흥복사 영역이 점차 조선왕조 각 아문에 분할 귀속되었다. 1457년(세조 3)에 흥복사를 폐하고 악학도감()을 두었다.

 

1464년(세조 10) 4월 효령대군(君-세조의 삼촌)은 회암사() 동쪽 언덕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치하고 『원각경()』을 강의하였는데, 이 날 저녁에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사리가 분신()하여 800여 개가 되었다. 5월 2일 효령대군은 사리를 세조에게 보이고 함원전(殿)에서 함께 예불하였는데, 사리가 또다시 400여 개로 분신하였다.

 

이에 세조는 대사령을 내리고 5월 3일에 흥복사 터에 거동하여 종친 및 신하들과 이 절터에 원각사를 창건할 것을 논의한 뒤 조성도감()을 만들었다. 6월 16일에는 대종()의 주조를 위해서 동() 5만 근을 전국에서 모으도록 하였고, 6월 19일에는 이 절 위에 서기가 나타났다.

 

8월 11일에는 공사 도중에 흙이 무너져서 2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하였으며, 9월 25일에는 다시 서기가 있어서 불충과 불효의 죄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는 사면하였다. 10월 30일에는 효령대군이 새로 만든 불상의 분신사리를 왕에게 바쳤는데, 11월 1일에 이 사리와 원각사의 사리에서 서기가 있어 죄인들을 용서하였다.

 

1465년 3월 1일에는 이 절에서 나한()의 분신사리를 왕에게 바쳤고, 3월 16일에는 형조에 명하여 이 절의 수소노()를 30구로 정하고 연고가 있는 자는 즉시 보충하도록 하였으며, 4월 6일에는 전지 300결()을 내렸다.

 

사월초파일에는 이 절의 낙성 경찬회()를 베풀었는데, 승려 128명이 참석하여 어정구결()로 번역한 『원각경』을 전독()하였고, 왕은 또 승려 2만명에게 공양을 베풀었다.

 

5월 6일 이 절의 사리가 또 서기를 나타내어 죄인을 사면하고 세금을 감면하였으며, 1466년 7월 15일에는 이 절에 봉안할 백옥불상이 완성되었으므로 함원전에서 점안법회()를 베풀었다. 1467년 사월초파일에 10층 석탑이 완공되자 연등회()를 베풀고 낙성하였다.

 

이때 이 절은 법당인 대광명전(殿)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는 선당(), 오른쪽에는 운집당()을, 뒤쪽에는 해장전(殿)을 지었다. 입구로부터 차례로 해탈문()·반야문()·적광문() 등 3문을 세웠고 종각()과 법뢰각(), 음식을 장만하는 향적료(), 10층 석탑 등이 있었다.

 

이 중 10층 석탑에는 분신사리와 언해본 『원각경』을 봉안하였고, 해장전에는 대장경을 두었으며, 법당은 청기와와 금칠로 꾸몄다고 한다. 또 법당 동쪽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서쪽에는 동산을 만들어서 화초를 심었다. 그 뒤에도 이 절의 사리가 서기를 나타내거나 분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 이 때마다 신하들은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예종은 즉위년인 1468년 10월 13일 원각사에 행차하였고, 12월 16일 세조의 백재()를 이곳에서 베풀었으며, 12월 22일에는 이 절에서 분향한 뒤 쌀 50석을 하사하고 죄인을 사면하는 한편, 원각사 밖에서 승려 1,000명에게 반승(:스님들에게 을 베풀던 행사)하였다.

 

1469년 윤2월 29일에 사리 245개가 다시 분신하자 강도 등의 중죄를 지은 자를 제외한 도형() 이하의 죄를 범한 자는 모두 용서하여 면제시켜 줄 것을 명하였으며, 7월 20일 이 절에 행차하였다. 성종은 1470년 3월 6일에 예종의 백재를 이 절에서 열도록 하였고, 1488년(성종 19)에 원각사가 불타자 재목과 기와를 내려 중수하게 하였다.

 

이때 홍문관부제학 안호() 등이 억불정책을 이유로 들어서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성종은 이 절이 선왕의 뜻에 의해서 창건된 사찰이고 외국의 사신과 승려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선후()의 하교를 받았기 때문에 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방()으로 만듦으로써 승려들이 머물 수 없게 되었고, 1512년(중종 7)에 원각사를 헐어서 그 재목을 나누어 줌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원각사 대종은 1536년에 숭례문()으로 옮겨 보루()의 종으로 사용하다가 1594년(선조 27)에 다시 종각으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원각사 자리였던 탑골공원에는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대원각사비가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각사 [圓覺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위 설명을 보면, 현재 안내문 속에 있는 '절이 없어진 후'가 아니라 '절을 없애 버린 후'란 설명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종각으로 옮긴 시기도 어느 것(선조 27년/광해군 11년)이 맞는지 모르겠다.

 

종각 안에 있는 종은 매달아 놓은 게 아니라 바닥에 있는 괴임목 위에 놓여있다. 종의 윗부분에는 새가 앉지 못하도록 망을 둘러놓았다. 

 

 

 

 

인도 혹은 지하철역이 아닌 여기서 너를 보니 얼마나 반갑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