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세운옥상과 종묘 그리고 사직단(2018년 3~4월)

무애행 2018. 5. 19. 21:43

종묘앞 광장에서 찍은 사진중 흐릿하게 보이던 보현봉 모습을 친구가 보내준 사진에서 더 또렷하게 확인을 하고 나서, 어디에서 찍었냐고 물었더니 '세운옥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세운옥상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나게 깨끗한 서울 하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 단장한 세운광장 준공식 장면이며, 세운옥상 행사 사진 등도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퍼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2018년 5월 19일)도 지난 사나흘간 마치 한여름 폭우같은 비가 내린 직후라서 그런지 서울 하늘이 아주 깨끗하다. 





어느날 아침,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라본 삼각산 모습 



2018년 3월초, 세운옥상에 대한 궁금증과 종묘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종묘앞으로 갔다. 하늘이 그다지 맑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볼만 했다.


다시 보니 세운광장이라고 불리는 넓은 공간은 상가 건물을 헐어내고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상가건물이 종로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말이다.




헐어낸 세운상가 하부를 발굴해서 이렇게 공개하고 있다. 





오늘의 주된 관심사는 세운 옥상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주의할 점은 비스듬하게 만든 광장 끝부분에서는 탈 수 없고 맨 아래층(유적전시관이 있는 곳) 안쪽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운옥상에서 바라본 서울의 북쪽 모습이다. 맨 위에 실은 사진에 비하면 선명도가 훨씬 떨어지지만, 종묘-창덕궁과 창경궁-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숲이 볼만하다. 


왼쪽에 보이는 봉우리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342m)이고, 가운데 높은 봉우리는 삼각산 주능선에 자리한 보현봉(714m)이다<마주보고 있는 문수봉(727m)이 더 높지만, 사진을 찍은 위치 때문에 보현봉 왼쪽에 조그맣게만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삼각산 주봉인 백운대(836m)와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세운옥상에서 바라본 서울 하늘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던 차에 1주일 뒤에 시내 약속 장소로 가는 도중에 다시 여길 들렀다. 마침 이 날은 구름이 끼긴 했지만, 시야가 훨씬 좋아져서 멀리 도봉산까지 보인다.






4월 11일 오후에 다시 방문한 세운옥상. 나무들이 초록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3월 초로 돌아와서, 옥상에서 바라본 남산의 모습과 옥상 생김새







해설 시간에 맞춰서 종묘 안으로 들어갔다.









삼도(三道)









망묘루는 궁궐을 떠나온 임금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라고. 근처에 신하들이 대기하는 장소인 향대청과 고려조 공민왕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고 했는데 그냥 지나친 것 같다.


해설을 들으며, 사진을 찍자니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행보다 뒤쳐지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래서 아래 사진을 찍은 곳이 망묘루인지, 아님 재궁(어재실)인지 잘 모르겠다.






여기는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묵는 곳(정전수복방)과 제물을 준비하는 곳(전사청)이라고



종묘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누구 모셔져 있는지 봤더니, 위패를 모신 방이 19개 밖에 되질 않는다.


조선조 27명의 임금중 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 그리고 삼촌에게 자리를 뺐긴 단종을 빼더라도 뭔가 이상하다. 내 어려서 듣기로는 무학대사가 종묘의 재실 숫자를 정할 때 조선조의 명운이 27대에 그칠 것이라고 해서 27칸만 지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종묘웹사이트에서 실린 설명을 들으니, 여기 정전에 위패가 있는 왕은 힘깨나 썼던 임금들이라고(이른바 불천위 不遷位)






처음에는 그리 크게 짓지 않았다가 수요가 생기면 남쪽으로 칸수를 점차 늘여왔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건축시기가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초 일요일에 종묘대제(중요무형문화재 56호)를 봉행키로 결정했다고한다. 그 때 들어오면 음식 맛도 볼 수 있는데, 엄청나게 많은 인파 때문에 구경하기는 쉽지 않다고.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후 및 추존된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 (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1395)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종묘 정전(宗廟正殿)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건축물이며, 총 101m의 긴 건물로, 종묘의 중심이 된다. 국보 제227호이다. 

정전 앞에는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월대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정전에 계신 왕들의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1928년 현재 

정전(태조에서 순종까지 19실 48위) ->이후 1위 추가
영녕전(목조에서 장조까지 15실 32위) -> 이후 2위 추가
공신당(功臣堂){태조부터 순종까지 83위의 공신배향(功臣配享)}






공신당(功臣堂)






영녕전(永寧殿)으로 이동했다.







마침 종묘 너구리 가족이 귀퉁이에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는 악공이 머무는 영녕전 악공청이 보인다.




우린 나가고, 다음 팀은 들어오고




정전악공청: 악사 대기실이다.



정전 담장안에 있는 이곳은 칠사당(3칸 짜리 작은 건물이다. '칠사'란 궁중의 신인 사명, 출입을 관장하는 호, 음식을 관장하는 주, 도성의 문을 관장하는 신령인 국문, 상벌을 주관하는 태여, 도로의 행작을 관장하는 국행, 그리고 중류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측면과 후면은 전으로 벽을 쌓고, 전면 중앙의 칸에는 판문을, 양옆 칸에는 격차창을 설치하였다)이라고.




종묘 설명중에 사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사(社)는 토지신(土地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상징한다. 옛부터 중국의 천자나 제후 또는 우리나라의 왕이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릴 때는 사직단(社稷壇)을 만들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내친 김에 사직단에도 다시 가보자 하고 버스를 탔더니, 서촌인 옥인동에 차가 멈춘다. 이왕 여기에서 내렸으니,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수성동계곡을 거쳐 가도 되겠다 싶었다.








통인시장도 구경하고 








박노수미술관. 여긴 입장료가 있다. 




윤동주가 하숙했던 집터! 






기린교로 추정되는 이 돌다리는 언제봐도 신기하다. 돌다리를 걸어서 건너고 싶었으나, 일대를 모두 출입금지구역으로 정해놔서 입맛만 다셨다.






수성동 계곡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금방 한양도성에 닿게 된다. 성곽 안쪽과 바깥쪽에 모두 산책길이 있다.




단군성전이다. 안에는 처음 들어가 본다.





정말 우리가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생각하는 게 맞는가? 그렇다면 그 격에 맞게 성역화 작업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매번 무슨 행사때만 되면 단상에 올라 축사를 하려는 인사들만 가득하다.



국궁전시관이라는 황학정으로 가 봤다. 여기도 전시관은 유료로 운영하고 있는데, 찾는 사람이 거의 없나보다.





종로도서관 앞길로 내려왔더니 사직단이 보인다.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인 동신문(위의 사진에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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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에서는 중춘(仲春)·중추(仲秋)·납일(臘日:동지 뒤의 셋째 成日)이 되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는 대향사(大享祀)를 지냈으며, 정월에는 기곡제를, 가뭄 때에는 기우제를 각각 행했다. 이러한 각종의 제례와 관리를 위해 1426년(세종 8)에는 사직서(社稷署)를 담장 밖 북쪽에 설치했다. 그리하여 1908년 칙령에 의해서 폐지될 때까지 사직단에서 국가제사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사직단은 담만 남고 나머지 부속물은 거의 파괴되어 사직과 종묘의 신주를 함께 옮기기도 했다.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옮겨진 바 있다. 1897년 10월 조선왕조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원구단에서 천지제를 행한 후 황제위(皇帝位)로 나아간 고종은 사직단의 지위도 올려 태사(太祀)·태직(太稷)으로 고쳤다. 그러나 사직단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됨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대신 일제는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와 관련된 부속건물들을 철거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학교부지로도 분할되었다. 1960년대에는 도시계획사업으로 인하여 그 부지의 축소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1970년대에는 도서관·수영장·동사무소·파출소 등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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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종묘는 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직은 어떠한고?


자료를 더 찾아보니,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 사직단 정문에서 해설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2018년 3월 18일 시작).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m-studio&logNo=221232872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