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고려조 윤관과 최영장군묘 방문기

무애행 2018. 5. 25. 14:30



마장호수 흔들다리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디를 더 불러봐야 하나 하다가 근처에 윤관장군묘(尹瓘將軍墓)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지금은 모두 윤관장군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고려조 문과에 급제해서 높은 벼슬에 이르렀던 사람이 윤관이다.


서기 1100년 초 고려(麗) 숙종~예종조에 동북쪽(지금의 함경도)에서 발호하던 여진족을 정벌하여(사실 전투란 것이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것인데, 역사서를 읽다보면 임금의 측근에 있는 관리들은 장수가 큰 공을 세워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실수라도 트집을 잡아 공훈을 깎아내리려는 경향이 있다) 국경의 안정을 가져온 윤관장군 묘를 찾아갔다.


주차장 근처에 윤관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려충사(麗忠祠)가 있고<사진 왼쪽에 려충사 글씨가 보임>, 저 멀리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 오른쪽에 세운 비석에는 '고려 문하시중 영평백(麗 門下侍中 鈴平伯) 문숙공 윤관장군 신도비(文肅公 尹瓘 將軍 神道碑)'라 새겨져 있다.


왼쪽에 있는 비석에는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 拓地鎭國功臣) 수태보 문하시중(守太保 門下侍中) 문숙공 윤관 대원수 사적비(文肅公 尹瓘 大元帥 事蹟碑)'라 적혀 있다.




이렇게 신도비와 사적비를 둘러보는 사이에 묘역관리실에서 해설사가 나와서 나를 안내한다. 나는 '장군'이란 표현과 '대원수'란 말의 기원 등에 대해 물었고, 이런 대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집사람은 근처에서 쑥을 뜯겠다고 빠졌다.


봉분이 있는 곳까지 올라갈 수 있냐고 하니까 흔쾌히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에서 보듯이 홍살문에서 여기 봉분까지는 마치 왕실 묘역을 보는 듯 규모가 상당하다. 고려조의 장군묘가 이렇게 큰 규모로 유지된 것은 아마도 원래부터 묘역이 크게 조성되었던 데다 조선조에서 파평윤씨로부터 왕비가 서너명이나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다만 외손이 된다는 청송심씨와의 묘지를 둘러산 소송의 빌미를 줄 정도로 조상묘를 돌보지 못했던 것은 후손들의 크나큰 불찰일 터!

(두 집안의 송사 내용은 

http://www.koya-culture.com/news/article.html?no=91022나 

https://gjicp.ggcf.kr/archives/artwork/%ED%8C%8C%EC%A3%BC-%EC%9C%A4%EA%B4%80%EC%9E%A5%EA%B5%B0%EB%AC%98 참조)

 


봉분앞에도 비석이 하나 있는데, 고려 수태보 문하시중 영평백 문숙윤공 휘권지묘(麗 守太保 門下侍中 鈴平伯 文肅公 之墓)라 적혀 있다.  



봉분앞에 있는 각종 석물들(일부는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 같았다). 그런데 봉분옆에 상돌이 하나 더 보이던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다.





윤관장군묘를 둘러보고 나니, 갑자기 고려조말의 충신 최영장군묘에 가보고 싶었다.


내가 어려서 선친으로부터 듣기로는 '최영장군이 하도 원통하게 죽어서 지금도 봉분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런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아래 인용구에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다). 아버님께서는 '포은 정몽주가 피를 흘리고 죽은 선죽교에는 아직도 붉은 혈흔이 남아있다'는 말씀도 내게 해 주셨는데, 개성까지 가기는 어려우니 오늘은 여기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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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23호로 소재지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번지이다. 

고려 말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처형된 최영(1316~1388)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1316)에 출생한 최영 장군은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었다.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 차례 토벌하여 공을 세운 때부터였다. 이후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조일신([趙日新)의 난과 공민왕 3년(1354)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2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1차 : 1395, 2차 : 1361)을 격퇴하였다. 공민왕 7년(1358)에는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수십 차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격퇴시킨 바가 있다. 요동을 정별하려고 우왕([禑王)과 함께 출정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 : 1335~1408, 태조)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 1388)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혔다. 이후 고양에 유배된 뒤 우왕 14년(1388)에 충주에서 처형되어 이 곳에 안장되었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문화유씨와(文化柳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의 형태는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으로 2단의 호석(護石)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 양식의 방형묘(方形墓)이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魂遊石),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있으며 그 좌우에는 후대에 세워진 묘비 2기가 있고 봉분의 좌측 후편에 원래의 묘비 1기가 세워져 있다. 묘역의 윗편에는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역이 있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는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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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지 않은 주차장에는 최영장군의 부친께서 남겼고 최영장군이 평생 실천했다는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안내표지판은 심하게 낡았으나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지금은 산책로로 조성된 진입로를 따라 500여m를 올라간다.






돌로 만든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2기의 봉분이 보인다. 뒤편은 최영장군의 아버지 묘.


최영장군의 상석 옆 화병에는 누군가가 꽃을 꽂아놨다. 봉분은 특이하게도 4각형 둘레석 위에 조성되었다. 






코가 다 사라졌다.





햇살이 따뜻하다. 여기저기에 봄꽃이 보인다.


집사람은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고 주차장 근처에서 쑥을 캐느라 정신이 없다.





주차장 근처에 있는 안내 푯말. 


내려올 때 보니 '전주이씨 종손'이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써 두 집안의 구원이 다 풀렸으려나?



내친 김에 바로 근처에 있는 성녕대군 묘역을 둘러봤다. 성녕대군은 조선조 태종의 네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으나, 후사없이 14세에 일찍 사망했는데 이에 세종은 아들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였다. 그렇지만 안평대군이 세조반정에 가담한 이유로 처형당하자 어쩌구 저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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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원경왕후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적자)로, 39세의 늦은 나이에 아들을 본 태종과 원경왕후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자랐다. 1411년 성녕군(誠寧君)에 책봉되었고 1414년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진봉되었다. 우애가 깊고, 학문에도 뜻이 있었으나, 1418년(태종 18) 음력 2월 4일 홍역에 걸려 14살의 어린 나이로 <후사없이>생을 마감하였다. 부인은 성억의 딸이다. 셋째형인 세종(충녕대군)이 즉위한 후,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양자로 들어 왔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그 해 10월 19일 안평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멸문당하고 성녕대군의 부인 성씨 또한 그해 10월 22일 경상도 경주로 귀양가 폐출(廢黜, 지위나 작위, 관직을 몰수하고 내침)되었다.

1459년(세조 4)에 종부시(宗簿寺)에서 대군가가 대(代)가 끊기어 제사봉행을 못하고 있으므로 효령대군의 6남 원천군(原川君) 의(宜)를 양자로 들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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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녕대군은 태종 생전시에 사망했으므로, 태종이 각별히 신경을 써서 묘역을 조성하고 그 옆에 '대자암'을 지어 명목을 빌게 하였다고 전해온다. 심지어 동네 이름도 대자동으로 변경하였다고.





성녕대군 묘역 아래에 있는 산소(양자로 들인 후손의 묘소로 추정)



성녕대군을 기리는 사당 대비사







비각







봄은 봄이다. 


이날 나는 윤관장군묘-최영장군묘-성령대군 묘역을 둘러보고, 집사람은 쑥을 캤다.